[류재국의 고전에서 묻다⑨]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루소의 <사회계약론>, 시민의 자유를 묻다

무질서를 막기 위해 강한 국가가 필요하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였다. 그러나 국가가 강해진다고 시민이 반드시 안전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 권력이 오히려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크의 <통치론>은 국가 권력의 한계를 물었다. 국가는 시민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 권력은 시민의 동의와 신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시민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공동체의 주인이 될 수는 없는가? 국가가 정한 법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법의 정당성을 함께 판단할 수는 없는가?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선언한다. 루소가 찾으려 한 것은 사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정치적 질서였다. 그 해답이 사회계약이다. 홉스가 안전과 질서를 위한 강력한 주권을 강조했다면, 루소는 주권이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물었다. 시민은 법에 복종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법을 만드는 공동체의 주권자여야 한다.
여기서 루소의 역설적인 주장이 나온다. 인간은 스스로 정한 법에 복종할 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만든 법을 따르는 것과 시민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참여해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은 다르다. 루소가 말하는 자유는 아무런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선거로 통치자를 바꾸거나 다수결로 결정하는 제도만을 뜻하지 않는다. 시민이 공공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법과 제도의 정당성을 따져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체의 뜻은 다수의 뜻과 같은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핵심 개념인 ‘일반의지’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지향하는 의지다. 사적인 이해관계를 단순히 더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수결로 결정된 것은 언제나 일반의지인가? 다수가 원한다는 이유로 소수의 권리를 희생하거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앞세운다면 공동체 전체의 뜻이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뜻을 실현하면서 그 뜻의 정당성도 물어야 하는 제도다. 더욱이 누군가 자신만이 공동체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면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다. 공동체를 위한 결정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며, 공공의 이익을 내세우는 권력일수록 시민의 비판과 감시를 받아야 한다.
시민은 국가의 보호 대상인가, 주인인가?
루소의 질문은 오늘날 정치권에도 유효하다. 국가의 권한이 크다는 것과 그 권한을 정당하게 행사한다는 것은 다르다. 요즘 청문회에서 나타나는,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언행과 일방적인 태도는 단순한 말버릇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규범에 관한 문제다. 정치인이 시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여기거나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정신에서 멀어질 수 있다. 정치의 힘은 상대를 제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의 판단 역시 비판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시민은 선거와 토론을 통해 공공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공동체의 이익을 내세워 개인의 자유와 소수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시민 역시 국가에 모든 책임을 맡기기보다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자유는 권력으로부터 보호받는 권리이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공동체의 문제에 참여하는 책임이기도 하다.
홉스는 무질서를 막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로크는 국가 권력에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루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가 어떻게 시민이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질서를 유지할 능력과 권력을 제한하는 원칙, 시민이 공동의 결정에 참여할 제도가 함께 필요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을 떠올려 볼 만하다. 한 소년의 살인 혐의를 심리하기 위해 모인 열두 명의 배심원 가운데 처음에는 열한 명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배심원이 증거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토론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과 편견을 돌아본다. 이 영화는 다수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며, 올바른 결정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토론과 소수 의견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동체의 결정이 정당한지 함께 따져 묻는 시민의 모습에서 루소의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국가는 시민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결정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말은 권력을 감시하고 공공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며 서로의 자유를 존중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홉스가 국가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로크가 국가 권력의 한계를 물었다면, 루소는 그 국가를 시민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가 시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이라면, 시민이 공동체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민주주의가 계속 풀어가야 할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