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홍보처장·국회의원 지낸 그와의 24년 인연을 돌아보며…
신중식 전 국정홍보처장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추석날 밤, 하루 지난 한겨레 종이신문을 통해 알게 됐다. 9월 23일, 향년 85세였다. 휴대전화에서 선배와 주고받은 카카오톡을 다시 열었다. 예전 대화는 사라지고 2024년 말부터의 기록만 남아 있다. 글을 보내면 얼마 뒤 답장이 올 것 같은데, 이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낯설다.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국정홍보처장으로 계실 때였다. 그해 1월 김대중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선배는 중앙일보·한국일보 기자와 <시사저널> 발행인·편집인을 거친 언론인이었다. 한일월드컵을 앞두고는 화장실 문화 개선을 비롯한 문화시민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선배에게는 먼저 정치 등 공인의 길을 걸은 형들이 있었다. 형 신형식은 고흥에서 네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건설부 장관과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또 다른 형 신정식은 국립소록도병원장으로 오랫동안 한센인들을 돌봤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살았지만, 세 형제의 이름은 고향 고흥의 기억 속에 함께 남았다. 신중식 선배는 2004년 총선 때 두 형의 청렴과 봉사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그 선거에서 선배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전남 고흥·보성에 출마했다. 민주당의 박상천, 무소속 박주선 후보까지 나선 치열한 3파전이었다. 선배가 당선돼 제17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유권자들은 형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배가 걸어온 언론과 공직의 길, 선거에서 내놓은 약속은 선배 자신의 것이었다.
선배는 꼬장꼬장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생각이 분명해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편안한 틈을 남겼다. 운동을 좋아했고 야구와 축구 관람도 즐겼다. 2019년 한국이 U-20 월드컵에서 세네갈을 꺾고 36년 만에 4강에 올랐을 때는 새벽잠을 설쳐가며 경기를 본 이야기를 아시아엔에 직접 썼다. 지난해 10월에도 축구 경기를 보며 득점 선수와 교체 선수, 이강인의 패스를 카톡으로 잇달아 전하셨다.
나라의 일에도 관심을 놓지 않았다. 2024년 말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항공 사고가 겹쳤을 때 선배는 경제와 민생을 걱정하며 여야의 협력과 신속한 수습을 촉구했다. 헌정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정치 원로들의 개헌 논의에도 참여했다. 남도학숙 원장 시절에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지방 학생들에게 등록금 못지않게 생활비가 무거운 부담이라고 짚었다. 선배가 살핀 것은 큰 정치만이 아니었다.
선배가 카톡으로 자주 건넨 것은 음악이었다. 날씨와 계절을 적고 건강을 당부한 뒤 노래 한 곡을 보냈다. 노사연의 ‘바램’, 이동원과 박인수의 ‘향수’,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 헨델의 ‘할렐루야’까지 폭이 넓었다. “틈나시면 잠시나마 한번 들어보시면서”라는 권유에는 답을 재촉하지 않는 여유가 있었다.
지난해 10월 2일, 신중식 선배의 고교 후배인 정운찬 전 총리와 함께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점심을 했다. 선배는 그날의 만남을 카톡에 적고 사진도 보내주셨다. 그것이 선배와 함께한 마지막 식사였다. 그때는 다시 만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사진 한 장이 선배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으로 남을 줄은 몰랐다.
작년 11월 아시아엔 창간 14주년을 맞아 내가 앞으로의 구상을 전했을 때 선배는 “더욱 발전하길 빕니다-신중식 올림”이라고 짧지만 마음이 담긴 글을 주셨다.
올해 5월 18일에는 레너드 코언의 노래를 보내며 “한국의 민주주의도 더욱 활짝 피길” 바란다고 적으셨다. 정치 현안을 살피던 선배와 음악을 권하던 선배는 같은 사람이었다.
지난해 가을비가 내리던 날 선배가 보내준 ‘바램’을 다시 찾아 듣는다. 노래를 보내며 계절의 정취를 함께 느껴보자던 선배의 글도 다시 읽는다. 그날의 점심과 그 뒤에 온 안부들이 이제는 선배를 기억할 수 있는 기록이 되었다.
신중식 선배님, 고맙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