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사회칼럼

필리핀 국방장관에게서 발견한 목계

길베르토 테오도로 주니어(Gilberto C. Teodoro Jr., 1964년생)는 필리핀의 변호사·정치인으로 ‘기보(Gibo)’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2007~2009년에 이어 2023년부터 다시 국방장관을 맡고 있다.

서울안보대화에서 발언하는 길베르토 테오도로 주니어 필리핀 국방장관의 모습을 유튜브로 보았다. 그는 침착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상대를 자극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자신의 말을 또렷하게, 흔들림 없이 이어갔다. 그 모습이 오래 남았다.

다음 날 오전 교육을 마치고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6·25전쟁 유엔 참전국 기념탑 가운데 필리핀 기념탑 앞으로 갔다. 필리핀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전쟁에 참전한 나라다. 기념탑 앞에서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7,420명 참전, 113명 전사, 313명 부상. 76년 전 이 땅에 왔던 젊은 필리핀 병사들의 숫자였다.

잠시 서 있다가 3층 유엔관으로 올라갔다. 필리핀 전시 코너에 이르렀을 때, 내 곁에 키가 큰 젊은 여성 두 명이 서 있었다. 필리핀 사람인지 궁금해 물었다. “Are you from the Philippines?”

두 사람은 그렇다고 했다. 나는 전시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First Asian country to arrive in Korea.” 두 사람은 곧바로 “Yes!”라고 답했다. 짧은 대화였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마음에 남았다. 76년 전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필리핀 병사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데, 지금의 필리핀에서 온 두 젊은 여성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전시실 안에서 시간의 거리가 잠시 사라진 듯했다.

전시물 가운데 젊은 필리핀 장교들이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 가운데 훗날 필리핀 대통령이 된 피델 라모스가 있었다. 당시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젊은 군인이었다. 한 사람의 젊은 병사가 전쟁을 지나 대통령이 됐다.

필리핀의 6.25 전쟁 참전 군인들. 이들 중에는 대통령을 지낸 라모스도 있다.

전시관을 나와 밖으로 나오니 길 건너편에 국방부 청사가 보였다. 나는 잠시 그 건물을 바라보았다. 전날 테오도로 장관은 서울안보대화가 열린 롯데호텔에서 발언했다. 국방부 청사가 그의 자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건물을 바라보는 순간 전날 화면 속 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까지 나는 그를 침착하고 당당한 우방국 국방장관으로만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야 문득 장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기성자(紀渻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길렀다는 이야기다.

목계. 장자 달생편에 등장하는 지도자 상을 말한다

처음 그 닭은 다른 닭을 보면 날뛰며 싸우려 했다. 그러나 훈련이 깊어질수록 다른 닭의 울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 닭을 보고 나무로 만든 닭, 곧 목계(木雞) 같다고 했다.

강하다는 것은 반드시 사납게 보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강한 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전날 필리핀 국방장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전쟁기념관에서 보았던 113명의 전사자와 313명의 부상자, 젊은 라모스의 사진, 전시실에서 만난 두 젊은 필리핀 여성의 “Yes!”도 차례로 떠올랐다.

나는 다시 길 건너편의 국방부 청사를 생각했다. 저기였다. 목계가 서야 할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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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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