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칼럼

[이상기의 사람읽기·이철용①] 꼬방동네에서 국회로…계단을 바꾼 사람

이철용은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아니다. 장애를 안고 세상의 계단을 바꾸려 한 사람이다. 그는 글로 꼬방동네의 문을 열었고, 정치로 국회의 계단을 두드렸다. 그가 오래 품어온 말이 있다. “답은 현장에 있다.” 가난을 책에서 배우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 곁에서 배웠다. 장애를 정책자료에서 발견하지 않았다. 자기 몸으로 계단 앞에 서서 알았다. 그의 삶이 남긴 것은 한 사람의 성공담이 아니라, 누구나 혼자 힘으로 건널 수 있는 길을 만들자는 요구다-본문에서.

사람의 한평생을 몇 줄의 이력으로 적기는 쉽다. 1948년생. 소설가. 빈민운동가. 제13대 국회의원. 장애인운동가. 역술인. 가수.

그러나 이철용을 이렇게 적으면 이철용을 놓친다. 그의 삶은 직함을 따라 이동한 이력이 아니라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 기록에 가깝다.

그는 태어난 지 6개월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돌이 되기 전 결핵성 관절염을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해졌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가족은 안암천변에서 살았다. 가난과 장애가 겹쳤다. 학교에서는 한 교사가 그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 그는 그날 이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시장통에서 리어카를 밀고 구걸도 했다. 동대문과 남대문을 떠돌았고 왈패들과 어울렸다. 패싸움 뒤 강원도 정선으로 숨어들어 공사판과 탄광에서도 일했다. 이 시절은 훗날 그가 쓴 소설의 바닥이 됐다. 그는 가난을 취재하지 않았다. 가난이 그의 유년과 청년을 통과했다.

1970년대 초 그는 동대문 일대 구두닦이 청소년 100여 명을 모아 은성학원이라는 야학을 열었다. ‘숨어서 이룬다’는 뜻이었다. 자신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구두를 닦는 아이들에게 공부할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철용 원작 <꼬방동네 사람들>에 출연한 안성기 배우. 왼쪽은 김보연씨.

이 무렵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의 노정현 박사 밑에서 일하던 박창빈 목사가 이철용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이를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 박창빈 목사는 이철용에게 여러 목회자와 현장 활동가를 소개했고, 노정현 박사의 도시 문제 연구와 이들과의 만남은 그가 공동체와 도시 빈민 문제에 눈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은성학원에서 구두닦이 청소년들과 함께한 경험은 이후 빈민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철용은 시장통과 야학, 도시 빈민의 삶을 따로 떼어 보지 않았다. 그가 쓴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도 이 시절 직접 만나고 함께 살아낸 사람들의 삶에서 나왔다.

1975년에는 서대문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북한 전단의 필적과 대조한다며 ‘김일성 장군 만세’를 반복해 쓰게 했고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당했다. 40여 일 만에 대공분실을 빠져나온 그는 수녀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간첩단 사건 조작을 폭로한 뒤 제 발로 다시 들어갔다.

1978년 여의도 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수배됐을 때 그는 대학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잡혀 죽더라도 자식들에게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았는지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경험과 밑바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지처럼 적었다.

그 글이 <어둠의 자식들>이 됐다. 수배 중이어서 처음에는 황석영의 이름으로 출간됐고, 황석영이 원고를 다듬었다. 주류 문학이 외면하던 도시 빈민과 성매매 여성, 시장통 사람들의 말과 삶이 책 안으로 들어왔다. 문학에서 보기 어려웠던 은어가 많아 출판사가 해설을 붙여달라고 할 정도였다.

<어둠의 자식들>이 팔리자 출판사는 한 권을 더 써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오과부>를 비롯해 그가 쓴 10여 권의 소설은 대체로 가난하고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다뤘다. 책을 쓰기 위해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다. 그들과 살았기 때문에 글이 나왔다.

그는 자신을 정통 문학교육을 받은 작가라고 내세우지 않았다. 한 평론가가 “저런 글이 어떻게 소설이냐”고 공격했을 때도 물러서지 않았다. 문단의 문법보다 현장의 말을 택했다. 그의 문학은 잘 정돈된 문장 이전에 기록이었다.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세상 한가운데 불러낸 기록이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 옆에 선 이철용 전 국회의원(왼쪽)

1988년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문익환 목사와 이문영 고려대 교수가 김대중에게 그를 추천했다. 김대중은 옥중에서 <오과부>를 읽고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철용은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 도봉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헌정사상 첫 장애인 출신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첫 등원 때 휠체어를 빌려 탔다. 평소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은 아니었지만, 국회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국회 직원들이 휠체어를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사람을 들어 옮기는 임시방편이 아니라 계단과 시설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김대중이 그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사진이 남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진 뒤의 일이다. 그는 여야 의원 135명의 서명을 받아 긴급예산을 확보했고, 건축 중이던 의원회관과 의사당 설계를 변경하도록 했다. 장애인 주차장과 통행료 면제,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에도 힘을 보탰다.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간사를 맡아 장애인과 노인 복지 예산 증액에 나섰다.

당시 법률 이름은 ‘심신장애자복지법’이었다. 이철용은 ‘심신’이라는 표현과 ‘장애자’라는 말부터 문제 삼았다. 법 이름은 장애인복지법으로 바뀌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권고 조항으로 되어 있던 내용도 의무 조항으로 바꾸는 데 힘을 쏟았다.

장애인 의무고용제도 그가 매달린 과제였다. 그는 100인 이상 사업장에 장애인 5% 고용을 주장했다. 여당은 500명 이상 사업장에 1%를 제시했다. 논의 끝에 300명 이상 사업장 2% 고용으로 절충됐다. 이상수·이해찬·노무현 등 당시 노동위원회 의원들과 함께 한 성과였다.

5공청문회 당시 이철용 평민당 의원(가운데)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질타하고 있다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는 전두환을 향해 답변을 똑바로 하라고 외쳤다. 증인석 앞으로 뛰어나가 항의하는 장면도 남았다. 빈민촌과 대공분실을 통과한 그에게 광주의 죽음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 훗날 정치에 들어간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의정활동에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정치의 조직과 권력 속에서 겪은 좌절도 컸다. 탈당 이후 정계 복귀에 실패했다. 정치 현장에서 보고 겪은 일을 <나도 심심한데 대통령이나 돼볼까> 같은 정치평론집에 담았다. 정치가 끝난 자리에서도 그는 정치를 입신의 사다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수단으로 물었다.

이철용은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아니다. 장애를 안고 세상의 계단을 바꾸려 한 사람이다. 그는 글로 꼬방동네의 문을 열었고, 정치로 국회의 계단을 두드렸다.

그가 오래 품어온 말이 있다. “답은 현장에 있다.”

가난을 책에서 배우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 곁에서 배웠다. 장애를 정책자료에서 발견하지 않았다. 자기 몸으로 계단 앞에 서서 알았다. 그의 삶이 남긴 것은 한 사람의 성공담이 아니라, 누구나 혼자 힘으로 건널 수 있는 길을 만들자는 요구다.(계속)

무대 위 이철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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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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