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기 아시아엔 발행인은 10월 6일 영월 동네방네 기자단 특강 ‘내 삶을 다시 비추다’에서 참석자들과 옛사진을 보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녹취와 참석자가 준비한 회고글을 바탕으로 김남수 전 교장, 박봉주 대한노인회 영월군지회 수석부회장, 김흥식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구술은 뜻을 살려 읽기 쉽게 다듬었다. <편집자>
“여러분 손수건을 지참하시고 구경 오시기 바랍니다.”
김흥식씨는 어린 시절 극장에서 들었던 안내방송을 기억하고 있었다. 옥동광업소 영화관에서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상영하던 때의 일이었다. 오래된 사진을 설명하다 나온 목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보던 광산촌의 풍경이 살아났다.
1954년생인 김씨는 10월 6일 영월 동네방네 기자단 특강 ‘내 삶을 다시 비추다’에서 사진첩을 펼쳤다. 군복을 입은 청년과 줄배, 극장 앞에 선 형, 눈밭에서 놀던 아이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시절 영화 한 편을 보려면 품을 들여야 했다. 돈이 없으면 극장 직원에게 포스터와 풀을 받아 동네 담벼락에 붙였다. 일을 마치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김씨에게 영화는 스크린 속 이야기와 함께, 포스터를 들고 다니던 골목의 기억으로 남았다.
광업소 직원 가족들은 아버지 도장을 들고 극장에 가기도 했다. 도장을 찍고 영화를 보면 관람료가 나중에 월급에서 공제됐다고 한다. 그의 기억 속 ‘옥광회관’은 1층과 2층에 관객이 들어차는 곳이었다. 광부와 가족들이 함께 웃고 울던 마을의 공간이었다.
광업소는 가족의 살림을 떠받치는 일터였다. 주변 산골에서 옥수수와 감자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 광업소 직원은 쌀밥 먹는 게 가능했다. 일터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였고 가족들의 생활도 이어졌다.

군복을 입은 사진에서는 공병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다리가 끊겼을 때 놓는 장간조립교와 도보교, 지뢰 탐침과 철조망 구축을 배웠다. 추운 겨울철 보병들은 야외에서 훈련하는 동안 실내교육을 받는 자신들을 부러워 하며 ‘카투사’라고 놀렸다는 기억도 웃으며 꺼냈다.
고씨굴 사진에서는 줄배가 떠올랐다. 지금처럼 다리로 건너던 때가 아니었다. 강에 매어놓은 줄을 이용해 배로 오갔다. 비가 오면 구경을 갈 수 없었다. 사진 한 장에는 강을 건너야 닿을 수 있었던 옛 관광지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겨울에는 비닐포대가 썰매였다. 눈 덮인 언덕에 포대를 깔고 앉으면 됐다. 엉덩이가 아프면 안에 방석을 넣었다.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미끄러져 내려왔다. 사진 뒤에는 광산촌의 집과 좁은 길도 보였다. 김씨는 지금 도로가 난 자리가 당시에는 리어카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했다고 설명했다.
큰형의 사진에는 동생의 자랑이 담겨 있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운전기사 조수로 일을 시작한 형은 평생 운전대를 잡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흰 장갑을 낀 채 광산에서 쓰는 나무를 실어 오던 모습이 어린 동생에게는 멋있게 남았다.

세월이 흐르자 사진 속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로 바뀌었다. 김씨가 이장을 맡던 시절, 어린 큰아들은 장래 희망을 묻는 선생님에게 “커서 이장이 되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 말이 무척 뿌듯했다. “다 크고 나니까 이장 된다는 소리는 없어졌어요.”
사람들로 가득했던 교회 사진 앞에서는 달라진 마을도 떠올렸다. 광업소가 번성하던 때는 가족과 아이들이 많았다. 지금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10여 명 정도라고 했다.
김씨는 “제 것은 이제 다 된 것 같습니다”라며 설명을 마쳤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에게는 사진 속 장면들이 남았다. 영화 포스터를 붙이던 아이, 흰 장갑을 낀 형, 이장이 되겠다던 아들, 눈밭의 비닐포대까지. 그의 사진첩은 광산촌 사람들이 무엇을 즐기고 누구를 자랑스러워하며 살아왔는지 전하는 마을의 기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