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식씨는 일본군에 강제동원된 뒤 해방 직후 소련군에 붙잡혀 시베리아 등지에서 3년 8개월간 억류됐던 부친 문순남씨의 행적을 20여 년간 추적해왔다. <아시아엔>은 그 과정을 ‘아버지 흔적 찾기’ 연재를 통해 꾸준히 소개해왔다. 문씨는 2026년 8월 23일 일본 도쿄 지도로가후치 전몰자묘원에서 열린 ‘제24회 시베리아·몽골 억류희생자 추도의 모임’에 한국인 유족 대표로 참석해 추도사를 했다. 한국 유족의 이 행사 참석은 15년 만으로, 일본 언론들도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특히 이날 자리에는 일본인 생존자와 유족은 물론 대만 출신 억류 생존자도 함께해,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조선·대만 출신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문제를 다시 환기시켰다. <아시아엔>은 문씨로부터 현지 행사와 일본 언론 보도 내용을 전해 듣고, 그가 오랫동안 추적해온 부친의 억류 기록과 연결해 이번 기사를 마련했다. 한 개인의 가족사가 일본 제국주의 강제동원과 소련 억류, 그리고 전후 보상에서 소외된 식민지 출신 피해자들의 문제로 이어지는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편집자>

문용식씨 일본군 강제동원 뒤 소련 억류 부친 기록 20년 추적
8월23일 ‘시베리아 데이’ 추도식서 한국 유족 대표로 추도사
일본 생존자·대만 출신 101세 생존자와 한자리…언론 주목
“조선·대만 출신 억류자 실태조차 밝혀지지 않아”
“오늘의 추도는 과거를 미화하거나 잊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기록하고 인간의 존엄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새기기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시베리아 억류 흔적을 20여년 동안 추적해온 문용식씨가 8월 23일 일본 도쿄 국립 지도로가후치(千鳥ケ淵) 전몰자묘원에서 열린 ‘제24회 시베리아·몽골 억류희생자 추도의 모임’에서 한국인 유족 대표로 이같이 말했다.
일본 언론도 문씨의 참석을 주목했다. 24일자 <신문아카하타>는 ‘시베리아 억류 희생자 추도-한국 유족 15년 만에 참가’라는 제목으로 문씨가 일본인 유족들과 나란히 서 있는 사진과 함께 그의 추도사를 보도했다. 신문들은 문씨의 이름 표기를 ‘文龍植’으로 했다.
<마이니치신문>도 23일 현장을 취재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소련 등에 끌려가 숨진 사람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지도로가후치 전몰자묘원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1945년 8월23일, 해방 뒤 시작된 또 하나의 고통
8월 23일은 시베리아 억류 역사에서 특별한 날이다. 1945년 이날 스탈린이 일본군 포로 등을 소련으로 이송하도록 하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일본의 ‘시베리아억류자지원·기록센터’는 2003년부터 이날 희생자 추도행사를 열어왔다. 지도로가후치 전몰자묘원에는 옛 소련과 몽골 지역에서 수습돼 일본으로 돌아온 1만7000여 위의 유골이 안치돼 있다.
올해는 이 비밀명령이 내려진 지 81년째다. 억류 체험자와 유족뿐 아니라 일본 후생노동성 관계자와 정당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특히 눈길을 끈 사람은 올해 101세인 시베리아 억류 생존자 니시쿠라 마사루(西倉勝)씨였다. 니시쿠라씨는 문씨 등 한국 유족이 15년 만에 이 행사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당시 조선반도와 대만 출신 가운데 몇 명이 소련에 억류됐는지조차 최소한의 실태가 규명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참혹한 체험에 대한 동정에 그칠 것이 아니라 역사를 총괄하고 교훈을 공유해야 같은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문용식 부친 문순남씨, 일본군으로 끌려가 해방 뒤 소련군에 붙잡혀
문씨가 이 문제에 매달린 출발점에는 아버지가 있다. 문씨의 아버지는 1945년 6월 일본군에 강제동원된 사실을 일본신문들은 보도했다. 해방 불과 두달 전이었다. 일본 패망 직후인 8월 18일 중국 선양에서 소련군에 붙잡혔고, 긴 억류생활을 거쳐 1949년 4월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씨에게 1945년 8월 15일은 그래서 단순한 ‘해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날이다. 조국은 해방됐지만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강제억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문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한국과 일본, 러시아의 자료를 뒤지며 행적을 추적했다. 그 과정은 <아시아엔> ‘아버지 흔적 찾기’ 연재를 통해 오랫동안 기록돼왔다.
이번 문용식씨의 도쿄 방문은 그 개인적인 추적이 한·일을 넘어 식민지 출신 시베리아 억류자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국·일본·대만…세 나라의 기억이 한 테이블에
추도식이 끝난 뒤 오후 3시부터 지요다구 가가야키플라자에서는 ‘억류 체험자·유족과 이야기하다’라는 토크세션이 열렸다.
주최 측이 사전에 공개한 참석자는 니시쿠라 마사루씨와 대만 출신 억류 생존자 우정난(呉正男)씨, 사토 히데오씨, 그리고 한국의 문용식씨 등이었다.

특히 우정난씨의 존재는 이번 행사의 의미를 더한다. 그는 1927년 대만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한 뒤 1944년 일본 육군에 들어갔다. 1945년 8월 한반도 북부 선덕비행장에서 종전을 맞았지만 소련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7년 7월에야 일본 마이즈루항으로 돌아왔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 출신 피해자의 아들 문용식씨와 대만 출신 생존자 우정난씨가 81년 뒤 도쿄에서 마주 앉은 것이다.
“일본군이었지만 일본의 전후 보상에서는 빠졌다”
시베리아 억류는 일본에서는 중요한 전후사 문제로 다뤄져왔다. 그러나 그 역사에는 식민지 조선인과 대만인도 있었다. 이들이 몇 명이었고 어디에 억류됐으며 얼마나 희생됐는지조차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이 올해 추도식에서 다시 제기됐다.
이는 문씨가 오랫동안 던져온 질문과도 겹친다. 전쟁 때는 일본군의 일원으로 동원됐던 조선인이 왜 전쟁이 끝난 뒤 피해를 조사하고 보상하는 과정에서는 일본 국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주변부로 밀려났느냐는 것이다.
이날 일본인 유족 대표 이이다 유미코(84)씨도 자신의 아버지가 만주에서 일본군에 징집된 뒤 시베리아에서 숨진 사연을 소개하며 일본 정부에 침략전쟁과 자국민을 버린 역사까지 제대로 규명할 것을 요구했다.

101세 생존자와 2세 유족…기록할 시간 거의 없어
이제 시베리아 억류 문제는 역사적 책임과 함께 시간의 문제가 됐다. 올해 추도식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은 생존자가 101세다. 당사자들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문씨가 도쿄에서 일본 언론의 카메라 앞에 선 것도 그런 까닭이다.
아버지 한 사람의 억울함을 밝히는 데서 출발했지만,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조선인과 대만인을 포함해 아직 제대로 이름조차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1945년 8월, 조선은 해방됐다. 그러나 일본군에 동원돼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부 조선인들에게 해방은 곧바로 귀향을 뜻하지 않았다. 소련군에 붙잡혀 다시 수천㎞ 떨어진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이 있었다. 81년 뒤인 2026년 8월 23일, 그 피해자의 아들이 도쿄에서 일본과 대만의 생존자·유족들과 마주 앉았다.
문씨가 이날 일본에서 전한 메시지는 결국 하나였다.
전쟁이 끝났다고 피해자의 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찾아내는 일까지가 전쟁 이후 세대의 몫이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