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추어리] ‘올곧은 언론인’ 남시욱을 기억하며…아들 남정호의 다짐

이 글은 남정호 한국언론재단 이사가 1년 전 별세한 부친 남시욱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추모하며 쓴 글입니다. 한국 언론사의 격동기 속에서 곧은 언론인의 길을 걸었던 선친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그 유산을 이어가려는 아들의 다짐을 담고 있습니다. <편집자>
[아시아엔=남정호 한국언론재단 이사, 전 중앙일보 기자] 사회적으로, 그것도 같은 분야에서 성공한 아버지를 둔다는 건 여간 거북한 일 아니다. 자칫 호부견자(虎父犬子)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승진하거나 요직에 배치되면 “실력 아닌 빽 덕 아니냐”고 뒤에서 수군거린다. 그러기에 늘 몸가짐에 조심하고 억울하더라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그럼에도 ‘기자 남시욱’을 아버지로 둔 건 내 삶에 있어서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내가 기자가 된 것도 선친에 대한 존경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 기억의 출발점부터 아버지는 기자였고, 돌아가실 때까지 언론인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일년 내내 일요일도 쉬지 않고 뛰어야 했던 게 그 세대 기자들의 삶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추억이 있을 턱이 없다. 아버지의 모습이 그나마 생각나는 건 중고등학생 때였다. 학원을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면 늘 이불에 엎드려 책을 읽고 계셨다.
서슬 퍼렇던 제5공화국 시절, 당시에는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아버지는 군사정권과 맞서 싸우셨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서 박종철 사건 보도를 진두지휘하신 것도 이 무렵이다. 어느 해 연말에는 술에 잔뜩 취한 군인에게 ‘집을 수류탄으로 폭파하겠다’는 협박 전화가 결려와 온 가족이 대피한 적도 있다. 당시 가끔 집에 오신 선친의 친구, 회사 동료들은 학생이었던 나에게 이런 예기를 했다. “지금 고초를 겪고 있지만 너희 아버지는 곧은 언론인이다”라고.
유교전통이 강한 곳에서 자라선지 아버지는 ‘선비’ 의식이 강했다. 개인의 영달보다는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으셨다. 대학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하면서 주변 친구들처럼 “미국으로 유학 가 경영학석사(MBA)를 따면 어떻겠느냐”고 슬쩍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당장 “너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얘기냐”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천둥같은 고함이 쏟아졌다. 선친이 그렇게 화낸 건 처음이었다.
결국 나는 선친을 따라 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친은 기자가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알기에 학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일단 기자가 되자 평생의 금과옥조로 삼을 가르침을 여럿 주셨다. 첫 번째는 ‘기자는 겸손해야 한다’였다. “성공한 취재원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기도 대단한 인물로 착각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유능하고 존경받는 기자, 언론인이 되려면 끊임없이 실력을 닦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셨다. 두 번째는 “늘 책을 읽고 공부하라”는 당부였다. “기자는 쉽게 접대 받는 직업이라 술이나 마시면서 건들건들하단 나중에 아무것도 안 된다”고 경고하셨다. 여기에 “기사는 짧게 써라” “비판은 상대방 얼굴을 보고 예기할 수 있을 수준으로 점잖게 해야 한다”는 충고도 하셨다.
돌이켜볼 때 선친은 이런 원칙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애쓴 언론인이었다. 한미관계와 보수 및 진보세력의 기원에 대해 천착한 학자이기도 했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게 78세 때였다. 남다른 집념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선친은 자손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유산과 함께 무거운 짐도 남겨 주셨다. ‘기자 남시욱’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을 책임 말이다. 얼마나 이룰지 모르지만 나 역시 곧은 언론인으로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 그리하여 훗날 ‘한국 언론계에 헌신했던 남씨 부자가 있었다’는 글귀가 역사서 한 귀퉁이에 새겨졌으면 하는 게 나의 소박하면서도 엄청난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