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4일] 킹목사 노벨상 안겨준 파크스 타계(2005년)

2007년 중국, 첫 달탐사 위성 ‘창어 1호’ 발사 성공

중국 최초의 달 탐사위성 ‘창어(嫦娥) 1호’가 2007년 10월24일 오후 6시5분(현지시간) 쓰촨성 시창 위성발사센터에서 발사되고 있다.

2007년 10월24일 오후 6시5분(현지시간) 중국 최초의 달 탐사위성 ‘창어(嫦娥) 1호’가 쓰촨성 시창 위성발사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중국은 중화 민족의 부흥을 선언한 후진타오 주석 집권 2기의 개시에 맞춰 달 탐사선을 쏘아올렸다. 러시아 미국 일본에 이어 중국은 세계 네 번째로 달 탐사국 자리에 올랐고 인도는 내년에 탐사선을 쏠 계획이어서 강대국 간 달 정복 경쟁이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1957년 옛 소련의 인류 첫 우주선인 스푸트니크호 발사 소식을 듣고 당시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중국은 우주선은커녕 감자 하나도 우주에 쏠 능력이 없다”고 개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50년 만에 중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달 탐사 위성을 멋지게 쏘아올렸다. 중국 당국은 “창어 1호가 1주일 뒤 지구와 달의 전이 궤도에 진입, 지구로부터 38만㎞ 떨어진 달 궤도에는 약 닷새 뒤 진입할 것”이라고 당시 발표했다. 달 상공 200㎞ 지점에서 127분 만에 한 번씩 돌며 1년간 탐사 활동을 한다. 달 표면의 광물 원소를 분석하는 한편 달 표면의 입체 영상도 전송할 예정이다.

무게 2350㎏이며 태양 전지판을 펼칠 경우 길이는 18m 정도다. 제작 및 발사비용으로 총 10억~14억위안(당시 환율로 한국 돈 약 1200억~1700억원)이 들었다.

시창 위성발사센터 인근에 마련된 1500석의 관람권(당시 환율로 한화 10만원 상당)이 금세 동났고 시창 시내 호텔 방도 매진됐었다.

아시아 우주 선진국들은 예의 야심찬 행보는 경쟁적으로 이어갔다. 중국은 이번 탐사위성 발사에 이어 2012년 착륙선,2017년 왕복선을 발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중국보다 먼저 같은 해 9월 달 탐사위성 ‘가구야’를 발사했다.

인도도 2008년 10월22일 오전 6시22분(현지시각) 인도 안드라프라데시 주 스리하리코타의 사티시 다완 우주 센터(Satish Dhawan Space Centre)에서 자체 개발한 극위성발사체(Polar Satellite Launch Vehicle)인 PSLV-C11에 달 탐사위성 ‘찬드라얀(산스크리트어로 ’달 우주선‘이라는 뜻)’을 탑재, 발사했다. 찬드라얀 1호는 총 312일간의 임무를 수행한 뒤 2009년 8월29일 오전 1시30분(현지 시각) 연락이 두절됐다.

창어 1호는 중국의 순수 자체기술로 연구개발해 제작한 최초의 달 탐사위성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항아가 달나라로 날아 올라가는’ 항아분월(嫦娥奔月)의 전설에서 이름을 따왔다.


2005년 스웨덴 세계 첫 바이오가스 기차 운행

2005년 10월24일 스웨덴이 세계 최초로 나무 부스러기와 동물의 배설물 등에서 나온 바이오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기차 운행을 시작했다.

재생에너지 제조, 판매업체인 스벤스크 비오가스(Svensk Biogas)가 만들어 수도 스톡홀름 남쪽 린최핑과 베스테르비크 사이 80㎞ 구간에서 운행하는 이 열차는 좌석 60석짜리 객차 한 칸으로 돼 있으며, 일단 하루 한 차례 왕복한다.

이 열차는 구형 피아트 열차의 디젤 엔진을 두 개의 볼보 가스 엔진으로 교체해 나무 부스러기와 동물의 배설물 등을 물과 섞은 탱크에서 나오는 가스 연료를 사용한다. 한 번에 600㎞를 달릴 수 있는 연료를 싣고 시속 최고 130㎞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

스벤스크 비오가스는 “공해가 적은 연료로서 수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마을마다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 새 일자리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1년 5월 현재 이 회사는 여전히 차량용 바이오가스 생산을 위해 연구개발을 하고 있고, 일부 연료는 상용화 돼 적잖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05년 미국 흑인 민권운동 선구자 로자 파크스 타계

2005년 10월24일(현지시각)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택에서 92살을 일기로 숨졌다.

생전의 로자 파크스. 뒤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보인다.

그는 42살 때인 1955년 12월1일 당시 흑백 인종별로 버스 좌석이 구분돼 있던 차별에 정면으로 맞섰다.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버스를 탄 뒤 자리 양보를 거부하고 앞자리에 앉았다. 당시 미국 남부지역의 법률에는 흑인들은 버스 앞자리를 백인들에게 양보하도록 돼 있었다.

백인들은 저항하는 그를 버스 밖으로 내던졌다. 곧바로 흑인들의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일으켰고, 뿌리 깊은 미국의 인종차별 정책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몽고메리에서 버스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혐의로 체포된 것은 파크스가 처음이 아니지만 그는 법에 도전했다. 당국에 체포돼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원 비용을 물었다. 이를 계기로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이끄는 흑인들의 조직적 버스 승차거부 운동이 일었다. 버스 승차거부 운동은 381일 동안이나 지속됐다.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킹 목사는 나중에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흑인과 백인 학교를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 판결 1년 뒤에 벌어진 이 사건은 현대 민권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이 운동은 1964년 절정에 이르러 공공시설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연방 민권법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위선으로 일그러진 미국 사회는 그의 생애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파크스는 당시 앨라배마주에서 직장을 잃고 수많은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1957년 남편과 함께 디트로이트로 옮겨가 의원보좌관으로 1988년까지 일했다. 1996년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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