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3일] 타이완의 대표 여걸, 역사속으로

2006년 헝가리 및 알제리 정부, 반기문 장관에게 훈장수여

2006년 10월23일 오후 4시 당시 한국의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은 알제리 정부로부터 ‘국가유공훈장(Medal of National Order of Merit)을 받았다. 그로부터 꼭 1시간 뒤 헝가리 정부로부터 ‘자유의 영웅 기념메달(Commemorative Medal of Hero of Freedom)’을 수여받았다.

알제리 주한대사를 통해 훈장을 전달 받은 외교통상부는 “반기문 장관이 한국과 알제리간 전략적 파트너쉽 수립 등 양국관계 증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것과 한국의 개발경험을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공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을 증대시킨 점을 높이 평가하여 국가유공훈장을 수여 하게 된 것”이리고 공식 발표했다.

역시 헝가리 주한대사를 통해 훈장을 전달 받은 외교통상부는 “헝가리 정부의 메달 수여는 반기문 장관이 지난 1956년 교현초등학교 시절 학생대표로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헝가리 의거 지지서한을 낭독한 사실을 헝가리 정부가 높이 평가한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6년은 헝가리 의거 50주년으로, 헝가리 정부는 헝가리 의거를 지지한 공적이 있는 각국의 주요인사에게 기념메달을 수여했다.

2003년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 사망

장제스 대만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사진 맨 왼쪽)과 큰언니 쑹아이링(宋靄齡, 가운데)과 작은 언니 칭링(慶齡, 앤 오른쪽). 대만에서는 대단한 3자매로 유명하다.

2003년 10월23일 장제스(蔣介石) 전 타이완 총통의 미망인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가 뉴욕 롱아일랜드 자택에서 10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쑹 여사는 1897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출생, 미국 웨슬리 대학에서 정규 교육을 받고, 중국에 귀국한 뒤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공부했다.

장제스 국민당 총재와 결혼, 중국 공산당에 맞선 투쟁으로 일생을 보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쑹 여사는 세계에 중국을 알리는 대표적인 소리가 됐다. 1936년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를 감금한 시안(西安)사변 때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단독 면담해 장제스를 석방시키기도 했다. 1943년에는 일본 점령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의회의 지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마오쩌뚱이 이끌던 공산당이 중국 내전을 승리로 이끌자, 1949년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피신했다. 1975년 장제스 사망 후 쑹 여사는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자택에서 거주해왔다. 미국 방문 중 3만명의 인파를 모았으며 2차례나 타임지 표지 인물이 될 정도로 미국 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쑹 여사는 그녀의 언니들인 쑹아이링(宋靄齡)과 칭링(慶齡)과 함께 유명한 3자매로 알려졌다. 큰 언니인 아이링은 엄청난 재력의 은행가와 결혼, ‘돈을 사랑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칭링은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과 결혼, ‘중국을 사랑한 여인’으로, 막내 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 불린다.

2002년 체첸반군, 모스크바극장서 인질극

2002년 10월23일 오후 9시5분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남쪽 멜니코바 거리 7번지 ‘돔 꿀뜨르이’ 극장에 40여명(일부 언론은 50여 명이라고 보도)의 체첸 반군이 급습, 인질극을 벌였다. 체첸 반군들은 체첸 주둔 러시아 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인기 뮤지컬을 공연하던 배우와 관객 등 700여명(일부 언론은 800여 명이라고 보도)을 잡고 경찰과 대치한 사건이다.

인질극의 주범은 체첸 반군 이슬람연대 사령관 모프사르 바라예프가 이끄는 테러리스트들로 나중에 확인됐다. 바라예프는 당시 “우리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왔다”며 “7일 안에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극장을 폭파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테러리스트 중에는 체첸 내전에서 숨진 전사들의 부인으로 알려진 여성들도 포함돼 있었다. 차도르로 얼굴을 가린 이들은 배에 폭탄을 두른 상태였다.

러시아는 체첸 출신 국회의원을 내세워 반군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반군들은 다음날부터 인질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특수부대원 100여명을 투입해 진압작전을 펼쳤다. 진압과정에서 유독화학 가스를 사용, 관람객 129명과 인질범 41명 등 모두 170여명이 숨져 인질극 진압작전 사상 드물게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인질극이 끝남과 동시에 체첸 주둔 러시아군은 체첸 반군에 대한 소탕 작전을 감행했다.

1859년 러시아 차르 군대에 의해 정복당했으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체첸은 이후 기나긴 박해를 받았다. 1991년 독립을 선포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1993년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3만여명이 죽었고, 1997년엔 대통령까지 살해됐다.

체첸 지역에는 석유가 많이 매장돼 있다. ‘검은 진주’ 석유는 전쟁과 테러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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