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1일]성난 印尼 군중들 일본대사관 습격(1962년)

2009년 한국 인천대교 개통기념 국제마라톤대회

2009년 10월11일 한국에서 가장 긴 다리인 인천대교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한 ‘인천대교 개통기념 2009 국제마라톤대회’가 인천대교 현장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인천시와 대한육상경기연맹이 공동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국내외 선수 77명과 마라톤 동호인 등 모두 3만여 명이 참가했다. 선수들만 참가하는 엘리트 부문 경기에서는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일본, 중국 등 해외 선수 27명과 국내 선수 50명이 레이스를 펼쳤고, 마라톤 동호인들이 참가하는 마스터스 부문은 3만여 명이 참가해 풀코스, 하프코스, 10km 등 3개 종목으로 치러졌다.

이날 오전 송도 대우자동차판매 부지를 출발한 참가자들은 인천대교 위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가르며 마음껏 달렸다.

엘리트 남자 부문에서는 케냐의 프란시스 킵코에치 보웬 선수가 2시간13분57초의 기록으로 우승했고, 여자 부문에서는 케냐의 엘리자베스 제루이요트 쳄웨노 선수가 2시간31분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갖고 19일 공식 개통할 예정인 인천대교에서는 17일 5만여명이 참가하는 걷기대회가 열리고, 18일 5천여명이 자전거를 타고 대교를 건너는 ‘그린 바이크 퍼레이드’가 개최된다.

10월16일 개통식을 가진 인천대교는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와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국제도시를 연결하는 길이 21.38㎞의 다리로, 전세계 교량 가운데 7번째로 길다.

2009년 아일랜드 민족해방군 “무장 포기” 선언

2009년 10월11일 강경 무장독립 노선을 고수해온 아일랜드 민족해방군(INLA)이 “무장투쟁 종식”이라고 선언했다. 아일랜드 민족해방군은 이날 “우리의 목적은 아주 평화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975년 결성된 아일랜드 민족해방군은, 북아일랜드공화군(IRA·1919년 결성)과 함께,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독립시켜 구교도 국가인 아일랜드와 통합하기 위한 무장투쟁 노선을 벌여온 대표적인 준군사 정치조직이다. 아일랜드 민족해방군은 1998년 북아일랜드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수많은 테러 공격을 감행했으며, 조직운영 자금 마련을 위한 마약 거래에도 개입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영국 정부의 숀 우드워드 북아일랜드 담당장관은 “아일랜드 민족해방군의 결정을 환영한다”며 “아일랜드 민족해방군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를 모두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2002년 춘사 나운규 <아리랑> 북한에서 시사회

2002년 10월11일 한국의 무성영화 나운규 <아리랑>이 북한에서 처음으로 공식 시사회를 가졌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공연 형식으로 재구성한 무성영화 ‘아리랑’을 이두용 감독을 필두로 제작한 시오리엔터테인먼트는 10월14일 세종호텔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지난 10월8일 방북, 11일 오전 10시 평양 국제영화회관에서 공식 시사회를 가졌다”고 밝혔다.

사진과 캡션은 <씨네21> 제공

지금까지 한국영화가 여러 경로를 통해 필름 또는 비디오테이프 등으로 북한에 전달되기는 했어도 시사회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날 시사회에는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 조찬구 문화성부상(차관), 조선예술 영화촬영소 고학림 연출소장, ‘림꺽정’으로 잘 알려진 최창수 배우단장, 김영숙 인민배우 등 북한 영화 관계자들과 일반 관람객들이 참가했다고 제작진들은 전했다.

한국측에서는 이철민 시오리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를 비롯해 변사를 맡은 양택조씨, 신우철 영화인협회 이사장, 이두용 감독 등이 참가했다.

시사회에서 북한 관객들은 코믹한 장면에서는 폭소를 터뜨리고 마지막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피날레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분단의 아쉬움을 함께 나누며, 합창으로 막을 장식했다.

1926년 10월1일 종로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한국 최초의 무성극 영화로,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모두 7편의 ‘아리랑’이 재구성됐지만 원형 그대로 제작 무성영화로 복원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1991년 소련 KGB 해체

1991년 10월11일 소련이 악명 높은 국가보안위원회(KGB)를 전격 해체했다고 선언했다.

1917년 12월20일 체카(Cheka)라는 비밀경찰기구로 출발한 KGB는 이후 베체카(Vecheka)라는 중앙집권적 행정조직으로 확대된 뒤 게페우(GPU), 오게페우(OGPU), 엔카베테(NKVD), 엔카게베(NKGB), 엠게베(MGB)로 개칭됐다가 1954년 4월27일부터 KGB로 통합됐다.

KGB는 정부기구로 당 서기국과 직접 연결돼 수백만 명의 협력자를 가진 거대 조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소련연방 붕괴로 KGB도 해체된 후 연방안전사무소(AFB)를 거쳐 1992년 1월 러시아안전부(MBR)로, 1993년 연방방첩국(FSK)으로 격하됐다.

체첸사태 등으로 정보강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1995년 러시아연방안전국(FSB)으로 개편, 정보기관의 성격을 강화했다.

1962년 4회 아시안게임서 화난 인도네시아 군중 일본 대사관 습격

1962년 10월11일 아시아경기대회 문제 불만으로 화가 잔뜩 난 인도네시아 군중들이 주 인도네시아 일본대사관을 습격했다. 한 달여 전에 끝난 제4회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73개, 은메달 65개, 동메달 23개를 획득해 내리 4번이나 우승한 일본이

1962년 아시안 게임은 아시아 경기 연맹(AFG :Asian Games Federation) 주관 아래, 8월 24일부터 9월4일까지 16일 동안 아시아 2개국이 줄인 16개국이 참가했으며, 참가선수는 1460명이다.

발단은 아시아경기대회 개최국인 인도네시아가 다른 아랍 국가와의 마찰을 우려해 이스라엘 선수들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또 당시 수카르노 정부에 맞서는 반정부세력을 도와주는 대만(당시 자유중국)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선수들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순수한 스포츠 경기를 정치문제와 결부시킨 것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국제육상경기연맹, 국제 역도 연맹 등은 이 대회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여 참가 선수와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했지만, 인도네시아는 대회를 강행했다.

국제역도연맹은 이스라엘과 대만의 대회참가를 막은 주최국 인도네시아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 대회 승인을 취소하고 한국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이란, 인도, 일본, 파키스탄, 필리핀, 홍콩의 9개국은 역도 종목에서 불참하는 보이콧을 단행했다. 역도 경기장에는 주최국 인도네시아만 남게 돼 결국 역도 경기는 모두 취소됐다.

국제수영연맹(FINA)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스라엘과 대만 선수들의 입국비자를 거부한 조치에 대해 1962년 아시안 게임의 인가를 취소했다.

인도는 제4회 아시안 게임을 비공인대회로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인도의 주장을 규탄하는 시위가 대회 중 그치지 않았다.

대회 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인도네시아를 IOC에서의 제명시켰다. 인도네시아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제명조치에 반발해 이듬해인 1963년 올림픽에 대항하는 국제경기인 가네포(GANEFO, Games of New Emerging Forces) 대회를 창설했다. 가네포 대회는 이듬해인 1963년 11월 자카르타에서 51개 나라 27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대회에서 배드민턴이 아시안경기대회 공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됐다.?축구에서 인도가 금메달을,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땄다.

제 4회 아시안게임 축구종목에서 인도 선수들이 경기에서 이긴 뒤 환호하고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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