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9일] 난징조약, 대사관 난투극…中-英, ‘마’가 낀 날

2010년 한일 강제병합 100년

2010년 8월29일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경술국치일’ 100주년을 맞아 두 나라 시민단체들이 모여 강제병합이 무효임을 밝히는 ‘식민주의 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시민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일실행위원회’에 참여한 141개 한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이날 서울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선언대회를 열고 “한일의정서, 제1~3차 한일협약, 한일병합조약은 모두 국제법에 비춰보아도 불법이고 무효”라며 “병합조약은 두 나라 민중을 불행하게 만들고 동양 평화를 파괴했던 주범”이라고 밝혔다. 두 나라 시민단체들이 경술국치와 관련해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양쪽 시민단체들은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토론을 벌여 공동선언을 작성했다.

한일 시민단체들은 이어 “식민지배와 그 피해자에 대한 사죄도 없고 배상도 없으며, 남북 분단이 유산으로 남아 한반도에서 식민주의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며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서는 이런 문제가 반드시 청산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일본 정부에 △강제연행·강제노동·병력동원에 대한 진상조사와 사죄·배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사할린·시베리아 억류 한국인에 대한 사죄·배상 △강제동원 희생자의 야스쿠니신사 강제합사 취하 △올바른 역사교육 등을 촉구했다. 또 이들은 “독도는 러일전쟁에 편승해 강제로 편입돼, 명백히 식민지배의 일환으로 일어난 역사문제”라며 “독도를 영토문제로 교과서에 기술하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이번 공동선언은 그 대상을 동아시아까지 포함하고, 식민지배로 지속되는 피해에 대한 즉각 구제 등을 기본 방향으로 삼았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미국 강타

2005년 8월29일 오전 6시10분(현지시각) 초강력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루이지애나주와 미시시피주를 강타, 최악의 환경 재앙이 벌어졌다. 카트리나는 북대서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중 6번째로 강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플로리다 주 내소 군 동쪽 약 280 킬로미터의 열대성 저기압으로부터 발생했다. 마이애미-데이드/브라우워드 군의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1등급 허리케인으로 커졌다. 플로리다를 가로질러 남서쪽으로 움직인 후 멕시코 만으로 빠져나갔고 2005년 8월 28일 꼬박 하루 이 일대에 머무르며 5등급에 도달했다. 2005년 8월29일 시속 225킬로미터의 강풍과 함께 3등급 허리케인으로 루이지애나 버라스-트라이엄프 육지에 2차 상륙했다.

주민 중 2만 명 이상이 실종됐고, 구조된 사람들은 인근 슈퍼돔에 6만 명 이상, 뉴올리언즈 컨벤션 센터에 2만 명 이상 수용됐다. 두 수용시설은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 물 공급 및 환기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이재민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또 수용시설과 폐허가 된 시가지에서 약탈, 총격전, 방화, 강간 등 각종 범죄가 계속 일어났다. 이재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흑인들의 인종갈등 조짐까지 보였다.

미국 동부 시간으로 8월31일 오후 11시, 캐나다와의 국경에서 소멸했다.


1987년 한국의 사이비종교 오대양 사건

1987년 8월29일 당시 뜨거운 여름에 전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간 엽기적인 집단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경기 용인시에 있는 오대양 공장에서 일하던 공원 김모 씨는 오전 11시 공장 식당으로 들어갔다 역겨운 냄새에 급히 코를 막았다. 냄새를 쫓아 식당 천장으로 올라간 김 씨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곳에는 여자 28명, 남자 2명 등 32명의 시신이 열 지어 뉘어져 있었다. 숨진 사람들은 이 회사 대표이자 사이비종교 교주인 박순자 씨와 박 씨의 두 아들, 딸, 맏동서, 조카, 회사 직원, 공장 종업원들이었다.

박씨는 300여 명으로부터 거액의 사채를 빌려 쓴 뒤 채무자와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던 중이었다. 숨진 사람들은 대부분 옷가지 등으로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목이 졸려 질식사했다. 현장검증과 시체 부검을 마친 경찰은 3일 뒤 숨진 사람들이 사이비종교의 교주인 박 씨의 자살 명령에 따라 신경안정제나 수면제 등을 먹은 뒤 혼미한 상태에서 이 공장의 공장장에 의해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박씨의 명령에 따라 5일 동안 무더위 속에서 식당의 슬레이트 지붕 밑에 숨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탈진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던 추종자들은 교주 박씨의 한마디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오대양 사건으로 숨진 사람들의 시체가 뒤엉켜 있는 끔찍한 모습


1967년 런던 주재 중국대사관 직원 난투극

1967년 8월29일 영국 런던 주재 중국대사관 앞에서 홍보 책자를 돌리며 마오쩌뚱 사상을 선전하는 중국대사관 직원들에게 런던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자 대사관 직원들과 런던 시민들이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영국 경찰이 출동, 싸움의 경위를 묻는 과정에서 중국대사관 직원들이 영국 경찰에 거칠게 항의했다. 화가 난 영국 경찰도 몸싸움으로 대응하자 말다툼 수준이던 싸움이 격렬한 난투극으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중국 외교관 8명과 영국 경찰 3명이 크게 다쳤다. 양국 정부는 서로 사과를 요구하는 등 외교적인 마찰까지 빚었다.

1949년 소련 핵실험 성공

1949년 소련이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했다. 1945년부터 약 4년간, 이날 직전 날까지 세계 유일의 핵무기 보유국이던 미국은 당황했다. 미국은 앞서 1945년 7월16일 사상 첫 원폭실험에 성공, 이를 곧바로 실전에 사용해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곧 이어 열린 포츠담 회담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드는 대가로 홋카이도의 반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일축했다.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이 소련에 대해 고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핵무기였다. 결국 소련은 홋카이도 분할을 포기하고 대신 한반도를 분할하게 됐다.

미국은 군사적 독점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소련은 첩보기관을 총동원해 미국의 핵개발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을 끌어들였고 결국 1949년 8월29일 카자흐스탄의 한 사막지대에서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 독점이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핵개발로 대표되는 냉전시대 군비경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핵무기는 이후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됐다. 미국·소련에 이어 영국·프랑스·중국이 잇달아 핵실험을 성공시키고 ‘핵 클럽’에 가입했다. 또 ‘제도권’ 밖에 있는 인도·파키스탄 등도 핵을 보유하게 됐다. 이스라엘 역시 핵실험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1842년 중국과 영국, 난징 조약 체결

1842년 8월29일 청나라와 영국 정부는 난징(南京)에서 조약을 체결, 제1차 아편전쟁을 끝냈다. 난징 조약은 중국 근대사에서 최초로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장닝조약(江寧條約)이라고도 한다.

제1차 아편전쟁은 영국이 청에 수출한 아편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 영국이 밀수출하는 아편에 중국인들이 빠르게 중독됐으며, 많은 양의 은이 유출되는 등 중국의 농촌경제는 물론 국가 전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중국 정부는 아편수입을 강경하게 저지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39~1842년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청의 패배로 끝나 청나라 정부는 콘월리스호 선상에서 영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난징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의 요지는 ▲홍콩을 할양할 것 ▲광저우(廣州)·푸저우(福州)·샤먼(厦門)·닝보(寧波)·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를 통상항(通商港)으로 개항할 것 ▲중국은 영국에게 은화 2100만 원(元)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 ▲영국의 수출입 화물 관세율은 중국과 영국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결정할 것 등이었다.난징 조약을 계기로 청은 1844년 미국과 왕샤조약(望厦條約), 프랑스와 황푸조약(黃捕條約)을 잇따라 맺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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