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일]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타계

2010년 ‘집속탄 금지’ 협약 발효

2010년 8월1일 반(反)인도주의적 무기로 비난받고 있는 ‘집속탄’의 사용과 보유를 금지하는 협약이 발효됐다. ‘집속탄금지협약’(CCM)은 2008년 초안 채택을 시작으로 2010년 당시 107개국이 서명했다. 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37개국은 비준 절차까지 마쳤다. 협약 가입 국가는 집속탄 생산을 중단해야 할 뿐 아니라 보유 집속탄도 원칙적으로 8년 내에 없애야 한다.

집속탄 최대 생산국인 미국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한국, 북한 등이 협약을 외면하고 있다.

협약에 참가하지 않은 미국은 지난 2011년 11월25일까지 2주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특정재래식무기금지협약(CCW) 평가회의에서 “1980년 이후 생산된 불량률 1% 미만의 집속탄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촉구했다. 국제사회는 미국이 사실상 CCM을 무력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집속탄(集束彈)(cone of fire)은 한개의 폭탄속에 또다른 폭탄이 들어가 있는 폭탄을 말하며, 넓은 지형에서 다수의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대표적 비인도적 무기다.

협약이 발효된 2010년 2월 라오스 남부 작은 마을 참파삭에서 어린이 5명이 집속탄을 갖고 놀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어린이들이 소에게 풀을 먹이다가 미군이 1960~70년대 투하했던 집속탄 중 한 종류인 ‘비엘유(BLU)-3’를 발견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이들은 생김새 때문에 ‘파인애플탄’이라고도 불리는 이 집속탄을 장난감으로 여겨 갖고 놀다가, 아이들 중 5명이 즉사하고 1명이 크게 다쳤다. 비극적 사건이지만 라오스에선 자주 있는 일이다. 집속탄 사용 금지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인 ‘집속탄연맹’(CMC)의 찬나파 캄봉사는 “라오스에서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일뿐”이라고 말했다.

최대 피해국인 라오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집속탄이 민간인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는지 알 수 있다. 미군은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북베트남군이 라오스를 경유해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으로 운반하자, 라오스에 비밀리에 엄청난 공습을 가했다. 흔히 ‘비밀 전쟁’으로 불리는 이 공습작전에서 미군이 투하한 집속탄 자탄은 2억7000만개에 이른다. 집속탄은 불발률이 많게는 40%에 이르기 때문에, 피해는 미군이 애초 노린 전투 요원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라오스 민간인들이 주로 입었다. 전쟁이 끝난 지 약 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해마다 300명가량이 집속탄에 희생되고 있다.

최근에는 단기간에 집속탄이 집중적으로 사용돼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코소보에선 지난 1999년 11주 동안 투하된 집속탄 자탄 숫자가 23만~29만개로 추정된다. 더구나 코소보 민간인 집속탄 피해자의 62.5%는 18살 이하 소년이다.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당시 이스라엘은 레바논에 단 사흘 동안 집속탄 자탄 400여만개를 투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장애인 단체인 핸디캡인터내셔널은 2007년 조사에서 집속탄 피해를 입은 사상자가 확인된 것만 최소 21개국 1만3306명이라고 밝혔다.

국제사회에서는 집속탄이 군사적 효용성은 떨어지면서도 민간인 피해만 높인다며, 금지 협약 미가입 국가에 가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제적십자위원회 관계자는 이스라엘이 2006년 집속탄을 엄청나게 사용했지만 파괴한 군사시설은 거의 없다고 무용론을 제기했다. 평화운동가들은 피해 지역에 있는 집속탄 대부분은 미국제인데 이는 집속탄이 냉전시대의 유물이라는 점을 반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0년 파키스탄 대홍수, 사망자 1100명 넘어

매년 홍수로 수백명의 사망자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을 낳고 있는 파키스탄. 사망자가 1100명을 넘었던 2010년 당시 이재민들이 피난을 가고 있다.

2010년 8월1일 당시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에 발생한 최악의 홍수로 사망자가 1100명을 넘어섰다. 2만7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홍수로 고립됐다.

파키스탄은 매년 홍수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 지난 2011년에도 8월 이후 홍수로 300명이 사망하고, 6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스와트(Swat)지역은 홍수 범람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세력과 파키스탄 군 사이에 일부 전투가 벌어지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국제사회는 즉각 피해복구 지원의사를 밝히고 실행에 옮겼다.

류젠 주(駐) 파키스탄 중국 대사가 7일 현지에서 히나 라바니 카르 파키스탄 외무장관을 만나 홍수피해 복구를 위해 500만달러(59억 원)의 현금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지난 2월1일 “2010년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이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에 수출하는 75개 품목에 대해 2년간 관세 부과를 유예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간 파키스탄 내 반미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써온 미국도 즉각적으로 파키스탄 북서부 피해지역에 대한 긴급 지원에 나섰다. 미국은 수천 부대의 식량을 전달했으며 4척의 구조보트를 보냈고 물 여과 장치 등을 북서부 피해지역에 이미 전달했다.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대사관은 12개의 철재 부교와 이재민 구조 및 소개를 위해 적극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2009 필리핀 아키노 전 대통령 타계

2009년 8월1일 20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마감시켰던 필리핀 ‘피플파워’의 주역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이 결장암 투병 끝에 타계했다. 76세.

생전의 코라손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상원의원은 “어머니가 이날 오전 3시18분(현지시간)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아키노 전 대통령은 결장암으로 16개월간 투병해 왔다. 미국을 방문 중인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10일간의 공식애도 기간을 갖도록 지시했다.

부유한 정치가문에서 태어난 아키노 전 대통령은 뉴욕 마운트 세인트 빈센트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이어 1954년 당시 전도유망한 정치인 베니그노 아키노와 결혼, 남편의 사망 이전까지는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다.

하지만 필리핀의 정치가 그녀의 인생을 180도로 바꿨다.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고 1972년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 지도자였던 남편 베그니노 전 상원의원이 투옥,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8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3년 뒤 귀국하던 베그니노는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던 중 피격, 사망했다. 마르코스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절정에 이르던 와중에 치러진 1986년 2월의 대선은 부정으로 얼룩졌다. 이때 시민들의 거센 봉기로 마르코스와 그의 부인 이멜다가 결국 하와이로 도피하면서 평범한 주부였던 아키노 여사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나약한 미망인에서 강한 의지를 가진 ‘철의 여인’으로 대중적 이미지를 바꾼 아키노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순탄치 않았다. 군부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지만 재임기간 동안 7번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농지개혁은 오히려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공산당 반군과의 대화는 군부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시키는 등 헌법을 개정,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지기도 했다.

2005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드(Fahd) 사망

2005년 8월1일 오전 사우디아라비아 파드 빈 압델 아지즈 국왕이 수도 리야드의 파이살 왕립 병원에서 사망했다. 84세였다. 이에 따라 파드 국왕의 이복 동생으로 지난 10년간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질적 통수권자였던 압둘라 이븐 압둘 아지즈(Abdullah Bin Abdul Aziz) 왕세자가 제 6대 국왕으로 등극, 왕위를 계승했다.

파드 국왕은 지난 1995년 뇌졸중으로 입원치료를 받았다. 사망한 해 5월27일 급성 폐렴으로 긴급히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이번에 왕위를 계승한 압둘라 왕세자는 파드 국왕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해 왔으며 그의 나이도 당시 82세로 고령이다. 또 압둘라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국방장관인 술탄 왕자가 왕세자가 됐다. 그러나 국방장관 몇 국왕승계 1순위인 술탄 왕세제는 지난 2011년 10월22일(현지 시각) 뉴욕 병원에서 향년 80세로 서거했다.

이에 따라 닷새 뒤인 10월27일 고인의 친동생인 나이프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왕위 계승 순위 1순위인 왕세제로 책봉됐다.

1944년 필리핀 초대 대통령 마누엘 케손 사망

1944년 8월1일 필리핀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마누엘 케손(Quezon, Manuel)이 타계했다. 향년 66세. 사인은 결핵이었다.

타야바스주(현재의 케손주) 발러에서 출생, 마닐라의 산토토마스대학교를 고학으로 다니던 중 필리핀혁명이 발발하자 혁명군에 참가, 미국을 상대로 싸웠다. 필리핀이 미국 점령 하에 들어간 뒤인 1905년 타야바스 주지사로 선출돼 정계에 투신했다. 1907년 제1차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그 뒤 필리핀 정치의 중심인물이 됐다. 1909∼1916년 워싱턴 주재 판무관을 지내면서 필리핀의 자치권 획득에 성공했다.

1935년 미국의 보호 아래 수립된 필리핀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41년 대통령에 재선됐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워싱턴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으로 있었다. 필리핀의 완전독립을 보지 못한 채 망명지인 미국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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