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3일] 천황과 식민주의에 맞선 일본여성
2001년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탄핵
2001년 7월23일 압두라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무능한 행정과 각종 부패추문 때문에 집권 21개월 만에 탄핵 당했다. 인도네시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민협의회(MPR)은 이날 재적 대의원 695명 중 598명이 출석, 11개 정파 중 민주투쟁당과 골카르당 등 9개 정파 591명의 찬성으로 와히드의 탄핵을 결정했다. 와히드를 지지하는 100여명의 대의원들은 탄핵절차를 보이콧했다.
와히드는 1999년 10월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조달청 공금 350억 루피아와 기부금 200만 달러를 횡령하거나 유용했다.
와히드는 이날 새벽 국민협의회의 활동중지와 1년 내 조기총선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한 포고령을 발표했지만 군부와 경찰까지 이 포고령을 거부했다.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부통령이 같은 날 오후 의사당에서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메가와티는 2차대전 후 네덜란드에 대해 독립을 선포했던 인도네시아 건국 대통령 수카르노의 맏딸이다.
와히드는 탄핵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궁에 머물 것이라고 밝혔으나 사흘 뒤인 26일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
와히드는 불명예스럽게 `탄핵`당한 인도네시아 최초의 대통령으로 남게 됐다. 집권 초기 그는 4000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인도네시아 최대 이슬람 단체 나들라툴 울라마(NU)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련의 민주화 정책을 실시해 오랜 독재에 찌든 국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995년 유조선 씨프린스호, 한국 남해안서 기름 유출
1995년 7월 23일 한국 최대의 해양 오염사고 중 하나인 ‘시프린스호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했다. 한국 해경은 이날 오후 2시5분경 전남 여천군 남면 소리도 북동쪽 1.5km 해상에서 태풍 ’페이‘를 만나 침몰한 호유해운 소속 씨프린스호가 이날 오후 4시경 폭발음과 함께 불이 난 뒤 기관실쪽 선체가 파손되면서 기름이 유출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고로 유조선 연료인 벙커시유 1400㎘와 탱크에 실려있던 원유 61만배럴(9만7000kl)중 2만9000㎘가 흘러나와 광양만 일대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지역까지 해상을 시커멓게 뒤덮는 참사를 빚었다. 흘러나온 기름은 남서풍과 조류를 타고 남해안 일대에 급속히 퍼져 여천, 남해, 사천, 거제 등지의 가두리-새고막 양식장 수만ha가 피해를 입었다. 유조선에 타고 있던 선원 20명중 19명은 배를 탈출해 소리도로 대피했으나 기관장은 실종됐다.
시프린스호는 좌초 125일만인 그해 11월26일 선박구난전문회사에 의해 좌초지점에서 빠져나왔다.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 결정
1982년 7월23일 국제포경위원회(IWC)가 4년 뒤인 1986년 이후 상업포경을 전면금지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스톡홀름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며 10년간 포경 금지를 요청하자 10년간의 갑론을박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IWC(국제포경위원회)는 당초에는 고래를 관리해 계속 잡아나가려는 취지에서 1946년 설립됐다. 당시 무분별한 포경으로 고래 자원의 감소 징후가 뚜렷해지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관리 대상은 전체 80여종 중 밍크고래 등 대형 9종이었다.
1952년 나세르 주도 무혈 쿠데타 발발
1952년 7월23일 이집트의 나세르는 영국 지배하의 이집트 왕조를 타도하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밀 혁명조직 ‘자유장교단’의 89명은 파루크 1세를 망명시키고, 모하마드 나기브 소장이 명목상의 국가원수가 됐다.
나세르가 이끄는 11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혁명평의회는 정부를 장악했다. 1954년 봄 복잡한 정치적 음모에 연루된 나기브는 해임·연금당하고 나세르가 막후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총리가 됐다. 1956년 나세르는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삼는 이집트 헌법을 공포해 통제권을 장악하고,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기도 했다. 나세르는 18년간 이집트의 정치 지도자로 있으면서 아랍 연합공화국을 세우고, 요르단 내전을 중재하는 등 아랍 세계의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와르 아스 사다트가 나세르의 후임 대통령이다.
1926년 죽음으로 천황제 폐지, 조선독립 원했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여성
1926년 7월23일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한국인 독립투사와 결혼하고 훗날 조선의 흙이 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선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2년 전인 1924년 도쿄의 재판정에서 그녀는 “조선은 독립해야 합니다. 같은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천황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합니다”라고 주장, 법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투철한 사상가였고 사랑에도 치열했다.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9살 때 조선에 건너와 충북 청원군 부용면의 고모집에서 하녀 취급을 받으며 어렵게 컸다.
1922년 도쿄에서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운명적으로 만나 ‘사상의 동지, 사랑의 동지’가 됐다. 무정부주의 운동을 함께하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이들은 천황 암살모의 혐의로 체포돼 원하는 대로 사형이 선고됐다.
그녀는 “부디 우리를 단두대에 세워 달라. 나는 박열과 함께 죽을 것이다”라고 재판정에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면서 그녀에게 보내온 ‘은사장’을 박박 찢어버렸다. 그녀는 경북 문경 박열 의사 기념관 옆에 영면하고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