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4일] 미국, 필리핀 독립한 날
2005년 미우주탐사선 ‘딥 임팩트’ 혜성 ‘템펠1’과 충돌 성공
2005년 7월4일 오후 2시52분(한국시간) 미항공우주국(NASA)은 미 우주탐사선 ‘딥 임팩트’호에서 발사한 충돌체가 혜성 ‘템펠1’과 성공적으로 충돌했다고 밝혔다. ‘딥 임팩트’호는 지난 1월 혜성과의 충돌을 위해 지구에서 발사돼 172일간 4억3100만km의 긴 여정을 항해해왔다.
‘딥 임팩트’호는 3일 오후 3시7분 세탁기만한 크기의 충돌체를 혜성 ‘템펠1’을 향해 발사했으며, 이 충돌체는 예상대로 24시간 만에 80만km를 날아 ‘템펠1’과 충돌했다. 미항공우주국 담당자들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부딪혔다”면서 사람이 만든 물체가 혜성과 처음 충돌한 광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미항공우주국은 이번 충돌을 위해 3억3300만달러(약 3330억원)을 투입했다.
한편 미국 나사는 이날로부터 꼭 8년 전인 1997년 7월4일 무인 화성 탐사선 패스파인더(path finder)호가 발사 7개월 만에 화성에 착륙해 첫 신호를 보내왔다고 발표했다.
패스파인더는 1976년 9월 3일 바이킹 2호 이후 두 번째로 이 붉은 행성에 착륙하는 우주선이 됐다. 착륙 다음 날 바퀴가 달린 탐사 로봇 ‘소저너’가 패스파인더호에서 분리돼 화성 지질 탐사에 나섰다.
탐사 장소인 아레스 밸리스 평원에 홍수가 발생했었고 화성의 지질학적 특성은 지구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2년 중국 서기동수(西氣東輸) 대장정 착공
2002년 7월4일 중국의 ‘서기동수(西氣東輸·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부로 보내는 것)’ 사업이 전면 착공했다. 중국 서부 타림(塔里木)분지에서 동쪽 끝 상하이(上海)까지 장장 4000여km에 가스 파이프 라인을 건설하는 170억 달러짜리 초대형 공사였다. 이날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 자회사인 중국석유공사와 더치 셸이 주도하는 국제 컨소시엄이 사업 기본협정을 체결했고,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국회의사당)에서 착공 기념식이 성대히 열렸다.
서부대개발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서기동수’는 서부 천연가스 개발과 동부의 에너지난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린 것이다. 서부의 타림·차이다무(柴達木)·산간(陝甘)·촨위(川兪) 분지의 대형 가스전(田)이 개발되고 가스 파이프 공사가 완공되면, 중국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50%까지 증가한다. 지름 1m의 가스 파이프는 도중에 황하강을 3차례 넘나들며 장강과 화이허(淮河)강 등 대형 하천을 대부분 통과한다.
신장룬난(新疆輪南) 가스전과 산베이창칭(陝北長慶)가스전 연결공사는 2004년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그 해 10월부터 서기동수 프로젝트가 전면적인 시운전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장쑤(江蘇) 저장(浙江) 등 4개 성과 상하이시는 이미 올 1월부터 지금까지 모두 5억여㎥의 가스를 이 관을 통해 시험적으로 공급받았다.
시험가동을 위해 중국 국내에서 제일 큰 야하(牙哈) 천연가스전에서 채굴된 가스가 제1차로 동부로 수송됐고, 2005년 1월1일부터 상업적인 공급작업이 본격화됐다.
신장 위구르 자치주의 천연가스를 양쯔(揚子)강 유역의 동부 산업시설로 수송하는 서기동수 프로젝트용 가스관은 신장룬난에서 상하이(上海) 바이허(白鶴)진까지 이어지는 동안 10개의 성 및 자치구, 직할시를 거치게 되며, 연간가스 수송량은 120억㎥이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 7월4일 남북한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천명한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양측은 공동성명을 통해 상호 중상비방과 무력도발의 금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 실시 등에 합의하고 이 합의사항을 추진하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약속했다.
이 공동성명의 발표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두 달 전인 5월2일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했고, 북측의 박성철 제2부수상도 5월29일 서울을 방문한 사실이 드러났다.
1946년 필리핀, 미국으로부터 독립
1946년 7월4일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독립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기간까지 포함하면 425년 만이었다.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어 마누엘 록사스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대통령 취임식은 비가 오는 가운데 진행됐다. 취임식에 참석한 수십만 군중 앞에 선 록사스 대통령이 ‘필리핀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식장에 게양된 성조기가 내려지고 그 자리에 필리핀공화국기인 ‘태양과 별의 기’가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게양됐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 제도를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미국은 필리핀을 영구적으로 식민지화 할 생각이 없고 다만 필리핀이 민주적 자치능력이 생길 때 까지만 지배하겠다고 했지만 이 기간이 36년간이나 지속됐다. 필리핀은 1934년 미 연방의회로부터 자치권을 승인받아 1935년에 발족한 필리핀 연방의 대통령에 케손을 선출한 바 있다.
한편 필리핀 독립일로부터 정확히 170년 전인 1776년 7월4일은 영국과 갈등을 빚어온 북미 식민지 대표들이 본국에 대해 독립을 선언한 미합중국 독립기념일이다. 대표들은 영국의 가혹한 지배에 반대해 식민지의 독립국임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대표들은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일제히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다. 종교적 자유를 찾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혹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북미로 온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위해 영국과의 충돌도 감수한 채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187년 이슬람 영웅 살라딘, 하틴 전투 승리로 예루살렘 탈환
1187년 7월4일 1만5000명의 그리스도교군과 살라딘(살라흐 앗 딘, Saladin)이 이끄는 1만8000명의 이슬람군이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중간에 위치한 하틴에서 맞붙었다.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초전으로, 그리스도교군은 참패했다.
살라딘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팔레스타인 해안가에 위치한 유럽인들의 영토로 쳐들어가 10월2일 88년간 유럽인들의 왕국이었던 예루살렘을 마침내 굴복시켰다. 살라딘은 이때도 관대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예루살렘의 왕을 풀어줬고 성안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공격을 하루 늦출 정도였다.
유대교ㆍ이슬람교ㆍ그리스도교 모두가 성지로 여겨온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이슬람군이 1차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뒤인 1099년 7월이었다. 이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의 영토가 된 것은 이슬람 영웅 살라딘이 등장하고 부터였다. 쿠르드족이었던 살라딘은 종족과 종파로 뿔뿔이 갈라진 아랍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군주였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늘 눈엣가시였다.
예루살렘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760여 년간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