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9일] 세계 첫 여성 대통령 탄생한 날
2011년 AP 평양지국 개설 합의
2011년 6월29일(현지시각) 뉴욕에서 미국 <에이피>(AP) 통신이 서방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북한 평양에 취재·사진 종합 지국을 개설하기로 합의, 북한 <조선중앙통신> 사장과 평양종합지국 개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해각서에 따라 <에이피> 통신은 <조선중앙통신>의 영상을 독점적으로 국제사회에 배급하기로 했으며, <조선중앙통신>은 <에이피> 통신의 북한 내 취재망을 보장·확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에이피> 통신은 취재·사진 기자의 북한 상주 근거를 갖게 됐다.
<에이피> 통신의 영상부문 계열사인 <에이피티엔>(APTN)이 2006년 5월 서방 언론으론 처음으로 평양에 사무소를 열었지만 뉴욕 본사에서 파견한 상주 직원은 두지 않은 채 홍콩 지사의 프로듀서가 수시로 평양을 방문해 취재를 하는 방식이다.
1940년대부터 한반도에 기자가 파견돼 취재를 해왔던 AP는 지난 1월 드디어 평양에 종합지국을 개설했다.
AP평양 이준희 지부장은 지난 24일 아시아엔과 만나 “2008년 서울에 왔을 때부터 다른 지국을 열어야 하고 그것이 평양지국이 돼야 한다는 목표를 계속 가져왔다”고 밝혔다.
2012년 6월 현재 평양 지국엔 상주하는 AP 북한 현지기자는 3명. 북한으로 파견된 지국장을 포함한 사진, 영상기자 3명을 합쳐 총 6명이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지부장은 “평양은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힘든 환경이다”라며 “평양에선 지국엔 전화를 걸 수 있지만 개개인 직원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는 사실은 신기했다”고 말했다.
또 정부관료들과의 인터뷰나 멘트를 직접 인용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외무부 대변인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긴 하지만 미팅 등 정부관료들 취재를 위해선 사전에 모두 준비하고 신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애로사항을 털어놨다.
2007년 중국 노동계약법 전인대 통과
2007년 6월29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가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강화한 노동계약법을 통과시켰다. 1994년 만들어진 노동법을 사실상 대체하는 이 법은, 중국의 노동정책이 사용자 우선에서 노동자 보호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으로 풀이된다.
전인대 상무위는 이날 △장기고용 촉진 △노조 권리 강화 △노동자 해고 제한 △경제보상금 신설 △사용자 처벌 강화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노동계약법안을 표결에 부쳐 최종 확정했다. 2005년 12월 초안이 제출된 이 법은, 네 차례에 걸친 심의 과정에서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의 집단적인 반발에 부닥치는 등 진통을 겪었다. 모두 8장 98조로 이뤄진 이 법은 2008년 1월1일부터 시행됐다.
노동계약법은 기업이 노동자를 고용할 때 1년 안에 서면계약을 맺도록 강제하고, 이를 어길 경우 임금의 2배를 배상하도록 규정했다. 또 단기계약을 2차례 연속 체결하면 3차 갱신 때부터는 종신계약을 맺도록 의무화하는 등 기업의 고용 책임을 강화했다. 노동자를 20명, 직원의 10% 이상을 감원할 때는 사전에 노조와 협의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행정기관에 신고하도록 규정했다. 노동계약이 만료하면 법률이 정한 기준에 따라 퇴직금에 해당하는 경제보상금을 줘야 한다. 노조(공회)에 집단계약체결권을 부여해 사실상 단체협상을 인정했다.
1995년 한국 부실공사한 백화점 붕괴로 500여명 사망
1995년 6월29일 서울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점이 붕괴, 사망 501명과 부상자 937명, 실종 6명 등 당시까지 전쟁을 빼고 해방이후 한국 최대의 인명피해를 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삼풍백화점은 1989년 12월에 개장한 지상 5층, 지하 4층인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붕괴 당일에는 슬래브판이 내려앉고 4~5층 일대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나는 등 붕괴의 조짐이 나타난 뒤 A동 5층 외곽 쪽의 한 기둥 둘레를 따라 펀칭 전단파괴가 발생해 기둥으로부터 주변 슬래브가 이탈되면서 붕괴가 시작됐다.
이후 4층 이하의 슬래브와 기둥들이 파괴되어 낙하하는 구조물들과 충돌, 충격을 받으면서 지하 3층까지 순식간에 연쇄적으로 붕괴되었다. 이와 동시에 A동이 붕괴될 때, 양측 코어를 수평방향으로 끌어당김으로써 코어에 수평변위가 발생되고, A, B동 중앙홀에 단순지지되었던 철골보가 지지점으로부터 이탈되면서 중앙홀 전층도 붕괴됐다.
사고조사 결과, 설계하자와 부실 건축시공 및 건축 후 건물 유지·관리상의 과오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해 발생한 것으로 판명됐다.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선언 발표
1987년 6월29일 당시 한국의 집권 민정당 대표위원인 노태우 국회의원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개항의 시국수습대책을 발표했다.
그 해 4월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개헌논의 금지 및 제5공화국 헌법하에서 차기 대통령을 뽑도록 한다는 이른 바 ‘4.13호헌조치’를 발표한 이래 한국은 민주화 시위로 전국이 뜨거웠고, 군사정권은 이를 무력진압하지 못하고 결국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 것이었다.
8개 시국수습대책은 1.여야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 2.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도록 대통령선거법 개정 3.김대중씨를 포함한 시국사범에 대해 광범한 사면, 복권 실시 4.구속적부심 등 인권보장 조항의 강화 및 기본권 신장 명시 5.언론자유 창달을 위한 언론관계법 개정 및 언론의 자율성 보장 6.균형 있는 사회발전을 위한 지방 교육자치제의 실시 7.정당활동의 자유보장 및 육성 8.맑고 밝은 사회건설을 위한 과감한 사회정화조치 및 사회비리척결 등이었다.
당초 6.29선언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개인의 견해로 전격 발표됐지만, 이틀 뒤인 7월1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국수습에 관한 대통령 특별담화’로 정부와 민정당의 공식입장으로 확정됐다.
당시 야당후보였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는 직선제 개헌에도 불구하고 단일화를 촉구하는 국민들의 여망을 뒤로 한 채 후보단일화를 거부,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당선됐다.
1974년 세계 첫 여성 대통령 이사벨 페론 취임
1974년 6월29일 지구촌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남미 대륙에서 나왔다. 43세의 나이로 아르헨티나의 제42대 대통령 이사벨 페론(1931~ )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2차례에 걸쳐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후안 페론의 세번째 부인이다.
후안 페론은 3명의 부인을 뒀다. 첫 부인은 결혼 9년 만에 병사했다. 2번째 부인이 뮤지컬 <에비타>로 유명한 에바 두아르테 페론이다. 국가사회주의를 뼈대로 한 ‘페론주의’를 내세우며,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파격적인 복지정책으로 대중적 인기를 확보한 에바는 ‘아르헨티나의 영적 지도자’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지만 일찍이 암으로 세상을 떴다. 이후 장기집권과 정치 부패로 가톨릭교회와 군부로부터 신망을 잃은 후안 페론은 쿠데타로 실각, 해외로 망명했다.
카바레 무용수이던 이사벨은 파나마의 한 클럽에서 후안 페론을 만났다. 1961년 35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정식으로 결혼, 후안 페론의 3번째 부인이 됐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정치적 동반자를 자처했다. 남편의 정치 인생에 헌신적이었던 에바와 마찬가지로 이사벨 역시 수차례 아르헨티나를 방문하며 지지 기반을 다졌다. 그리곤 1973년 대통령 선거에서 남편의 러닝메이트로 뛰었다.
1973년 10월12일 제4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안 페론은 이사벨을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고령의 후안 페론이 1974년 여름 기관지염과 독감을 앓던 후안 페론의 건강이 회복불능 상태이며 정상적인 국정 수행을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뒤, 이사벨의 대통령직 승계 절차가 진행됐다. 후안 페론은 그녀의 취임 이틀 뒤 사망했다.
그러나 국모로 추앙받던 ‘에바 페론’의 계승자를 자처한 그녀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고, 경제 파탄과 잇단 폭동으로 국가는 무정부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취임 2년이 채 안돼 쿠데타로 실각한 뒤, 남편의 전철을 밟아 5년간의 가택연금 후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