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비극, ‘캠프데이비드 협정’ ‘오슬로 협정’은 어디에
*아시아엔 해외필진 기고문을 한글번역본과 원문을 함께 게재합니다.
[아시아엔=아시라프 달리 아시아기자협회 회장] 2023년 5월 15일, 중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크바’(이스라엘 건국일이자 아랍어로 ‘재앙의 날’을 의미) 75주년을 기념했다.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은 이날을 ‘조국이 식민지가 된 날’로 기억하는 반면 이스라엘은 이날을 ‘모국을 세운 날’로 기억한다. 같은 날의 기억이지만 상반되는 두 입장, ‘그 간극을 어떻게 하면 좁힐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67년 6월 5일 아랍연합군이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일으켰던 제3차 중동전쟁에서 패하자 아랍권은 이를 ‘나크바’보다 더 치욕적인 ‘나크사’라 부르며 역사에 기록했다. 이 패배로 이집트와 시리아는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각각 잃었다.
유엔안보리는 1967년 6월 발발한 ‘6일 전쟁’에 따른 후속조치로 1967년 11월 22일 결의안 242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의안 242호는 “전쟁으로 인한 영토획득은 부당하다. 중동은 공정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추구함으로써 역내 모든 국가가 안전하게 공존해야 한다”고 했다. 결의안 242호의 제 1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엔헌장 원칙에 따라 중동에서의 공정하고 영구적인 평화의 확립이 필요하며, 이는 다음 두 가지 원칙을 적용시켜야 한다. (i) 이스라엘은 최근의 충돌에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며 (ii) 역내 국가들은 주권, 영토, 정치적 독립을 보장받아야 하며, 어떠한 위협이나 침략행위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이스라엘은 유엔결의안을 따르지 않았다. 그 사이 75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이 그들의 터전에서 추방당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가들로 떠났다. 물론 아랍국가들은 이들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환영했다.
1973년 2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이집트 분쟁에 대한 포괄적 해결안을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달했다. 이 제안은 이스라엘의 요구사항 대부분을 충족시켰으나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1967년 점령한 영토의 반환을 끝내 거부했다.
그로 인해 1973년 10월 6일 이른바 ‘욤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영토를 잃었던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이 영토를 수복하고자 전쟁에 나선 것이다.
1977년 11월 9일, 욤키푸르 전쟁의 승전국인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적국의 수도인 예루살렘, 심지어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셋을 방문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스라엘 정부는 사다트를 정중히 초청했으며, 사다트는 3일간 이스라엘을 방문하며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 최초의 평화협정을 논의했다.
당시 아랍국가 대다수는 사다트의 결단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이집트와의 관계를 끊었고, 아랍연맹 본부를 이집트에서 튀니지로 이전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그럼에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8년 9월 미국의 후원 아래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의 주요 골자는 ‘중동의 평화’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으로, 유엔안보리 결의안 242호에 근간해 탄생됐다.
중동과 이스라엘 최초의 평화협정을 이끌었던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1981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 승전 기념식 도중 이슬람 과격단체에 의해 암살됐다- 편집자
그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유엔결의안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자치권을 갈망하던 팔레스타인 외교 당국은 사다트가 걸었던 길을 따르려 노력했고, 그에 대한 산물로 ‘오슬로 협정’이 탄생했다.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의 협정으로, 1993년 워싱턴 D.C에서, 1995년 이집트 타바에서 두 차례 서명됐다. 오슬로 협정 역시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와 339호를 기반으로 작성됐는데,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실현하기 위한 평화적 해결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오슬로 협정의 주목할 만한 성과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NA)의 설립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일부 지역에서 자치를 수행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의 파트너로 인정받은 것 역시 주요 성과였다.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했던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역시 제2차 오슬로 협정 직후인 1995년 11월 유대인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됐다- 편집자
그러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서안지구에서 국가로서의 틀만 갖췄지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반면, 이슬람저항운동을 전개하는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자치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 부근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해 왔다.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에 인구를 이주시키는 것이 적법하지 않다”고 지적했음에도 말이다.
국제적 합의 당사자인 미국 역시 유대인 정착촌이 ‘불법’이라고 지적해 왔으나, 트럼프 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가 “미국은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더 이상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발표하며 입장을 바꿨다.
최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에서 기인한다. 평화협상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공격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 불법 정착촌을 건설해 왔으며, 알-아크사 사원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무력충돌을 유발해 왔다.
10월 전쟁(제4차 중동전쟁) 50년이 지난 현재, 하마스가 해방 전쟁을 시작했다. 지난 주말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공격에 대응하며 가자지구에 물과 전기 공급을 차단했다. 이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우리는 복수가 아닌 정의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조치는 앙갚음에 불과하다”고 호소했다.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PLO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이 이룩했던 평화협정은 이대로 종말을 고하는 것일까? 아랍 국가들은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를 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수십년 간 국제법을 수용하는 대신 그들의 이익을 선택했다.
1973년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정부가 평화적 해결방안을 택하지 않으며 발생했던 아픈 역사가 꼭 반 세기 후 네타냐후 정부에 의해 다시금 반복되고 있다.
Will an occupying state accept Peace?
by Ashraf Dali, AJA President
This year, on 15 May, the Middle East region marked the 75th anniversary of the Nakba in two different ways; Arab and Palestinian peoples commemorated the colonization of their homeland, while the occupying State of Israel celebrated the establishment of their country. One date, two opinions, and a lot has been written on how to bridge the gap between them.
The Nakba is an Arabic word, similar to defeat, or setback, so it is not something that Arabs celebrate or commemorate as they have been living many of setbacks, generation after generation.
When Arab armies tried to get their land back, they even got another defeat, which gave it a worse Arabic name; Naksa, on June 5, 1967, and they lost more lands, basically in Egypt (Sinai Peninsula) and Syria (Golan Hights).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242 was adopted unanimously by the UN Security Council on November 22, 1967, in the aftermath of the Six-Day War in June 1967, under Chapter VI of the UN Charter, referring to the “inadmissibility of the acquisition of territory by war and the need to work for a just and lasting peace in the Middle East in which every State in the area can live in security”.
Operative Paragraph One “Affirms that the fulfillment of Charter principles requires the establishment of a just and lasting peace in the Middle East which should include the application of both the following principles:(i) Withdrawal of Israeli armed forces from territories occupied in the recent conflict; (ii) Termination of all claims or states of belligerency and respect for and acknowledgment of the sovereignty, territorial integrity and political independence of every State in the area and their right to live in peace within secure and recognized boundaries free from threats or acts of force.
For the following six years, the occupying State of Israel didn’t respect the U.N. resolution. Over the years, the expulsion of over 750,000 Palestinians from their homes, farms and lands constituted a crime against humanity. Arab countries were open for those refugees, not only in neighboring Egypt, Jordan and Syria, but in the other Arab states in the Gulf and beyond.
Egyptian President Anwar Sadat had a proposal for a comprehensive settlement of the Egyptian-Israeli dispute, which was secretly submitted to US foreign minister Kissinger in February 1973. Despite the fact that it met most of Israel’s requirements regarding peace, Sadat’s proposal was rejected by Golda Meir, Prime Minister then, who refused to return the territories occupied in 1967. This led to the Yom Kippur War in October 6, 1973, and the two Arab armies of Egypt and Syria launched their war to get their land back.
After winning the war, on 9 November 1977, Sadat startled the world by announcing his intention to go to anywhere, even to Jerusalem and speak before the Knesset to discuss peace. Shortly afterward, the Israeli government cordially invited him to address the Knesset in a message passed to Sadat via the US ambassador to Egypt. Ten days after his speech, Sadat arrived for the groundbreaking three-day visit, which launched the first peace process between Israel and an Arab state.
Although most of Arab states refused Sadat’s act, by cutting relations and shifting the Arab League from Cairo to Tunisia, Sadat signed the Camp David Accords with Israel, with the patronage of USA to comprise two separate agreements: “A Framework for Peace in the Middle East” and “A Framework for the Conclusion of a Peace Treaty between Egypt and Israel”. The preamble of the “Framework for Peace in the Middle East” starts with the basis of a peaceful settlement of the Arab – Israeli conflict. The agreed basis for a peaceful settlement of the conflict between Israel and its neighbors is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242, in all its parts.
Along the years, the only country that didn’t respond to the U.N. resolution was the occupying State of Israel!
After years of refusal, the Palestinian diplomats tried to follow the path of Sadat. Then came Oslo Accords, which are a pair of agreements between Israel and the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 the Oslo I Accord, signed in Washington, D.C., in 1993; and the Oslo II Accord, signed in Taba, Egypt, in 1995. They marked the start of the Oslo process, a peace process aimed at achieving a peace treaty based on Resolution 242 and Resolution 338 of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and at fulfilling the “right of the Palestinian people to self-determination”. The Oslo process began after secret negotiations in Oslo, Norway, resulting in both the recognition of Israel by the PLO and the recognition by Israel of the PLO as the representative of the Palestinian people and as a partner in bilateral negotiations.
Among the notable outcomes of the Oslo Accords was the creation of the 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which was tasked with the responsibility of conducting limited Palestinian self-governance over parts of the West Bank and the Gaza Strip; and the international acknowledgement of the PLO as Israel’s partner in further peace talks.
The PLO couldn’t get any positive results other than having the frame of a state with no authority in the West Bank, while Gaza Strip is still dominated by Hamas (The Islamic Resistance Movement). The Israelis continued to neglect the recognition of the State of Palestine and its right to self-determination. The government of Israel continued in its plans to build Jewish settlements on Palestinian lands, such as the West Bank and East Jerusalem, which are one of the most prominent causes of the conflict between Israel and the Palestinians. The international community believes that Israel’s resort to settling its population on lands it occupied during the 1967 war is not legal.
The United States was a party to this international consensus, and had always indicated that these settlements were “illegal,” but it changed its position, especially after US Secretary of State Mike Pompeo announced that his government no longer considered Jewish settlements in the West Bank illegal.
What Hamas fighters did is a direct consequence of two causes; the failure of peace operations and the continuing assault of Israelis, not only by building illegal settlements on occupied Palestinian lands but also continuing attacking Al Aqsa Mosque.
After 50 years of October War, Hamas started its liberating war. And now, Israel is committing a war crime by cutting off water and electricity supplies to Gaza to act out of “sheer vengeance” in response to weekend attacks by Hamas. Palestinians “needed justice, not revenge, and what Israel is doing now is revenge, sheer vengeance.”
The peace initiative by Sadat, the peace accords by PLO Arafat failed. The Arabs have been seeking peace, while the occupying State of Israel is seeking its own benefit on the expense of other people, without thinking to accept peace or international laws for decades. In 1973, Golda Meir and her colleagues didn’t seek a peaceful solution, and in 50 years, history is repeating itself, as Netanyahu and his colleagues followed Golda Meir’s st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