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1일] 중일 공산당 32년만에 화해

2005년 자동차이용 반대자들, 집단 알몸 자전거 시위


2005년 6월11일 과도한 자동차 운행에 따른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자전거 타기를 생활화할 것을 촉구하는 자전거 애용자 수백 명이 지구촌 곳곳에서 알몸으로 자전거를 타며 시위를 벌였다.

‘세계나체자전거타기2005’의 회원들은 영국, 스페인, 호주, 캐나다, 미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라트비아, 이스라엘 등에서 알몸 자전거 타기에 나섰다. 영국에서는 하이드파크에서 약 100명이 모여 피카딜리 서커스-빅벤-코벤트가든-옥스퍼드거리-미국 대사관을 잇는 시내 중심가 10㎞구간을 자전거로 달렸다.

1998년 중일 양국 공산당 32년 만에 관계 회복

1998년 6월11일 중국 공산당과 일본 공산당이 ‘역사적 화해’를 결의했다. 양국 공산당 대표단은 이날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만나 관계 정상화 등 4개 항목에 합의했다.

4개 항목은 △양국 공산당은 미래 개척 정신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양당 관계를 정상화한다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 때 내부 문제 상호 불간섭 원칙을 위배한 점을 일본 공산당에 사과한다 △자주 독립과 평등 그리고 상호 존중과 내부 문제 상호 불간섭 원칙에 입각해 양당 간의 우호 교류를 증진한다 △일본 공산당 후와 데쓰죠(不波哲三)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한다 등이다.

이로써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단절된 양국 공산당의 관계가 비로소 정상화하게 됐다.

또 일본 공산당 후와 위원장이 8월28일 중국을 방문,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수뇌 회담을 가졌다. 중국과 일본의 공산당 대표가 얼굴을 맞대는 것은 32년 만의 일이었다.

1966년 3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미야모토 겐지(宮本顯治) 일본 공산당 의장은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미국 제국주의’의 베트남 침략에 반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오 주석이 미야모토 의장에게 양당 공동 선언문에 ‘반미·반소 통일 전선’이라는 말을 삽입하자고 주장, 소련을 배제하는 데 반대한 미야모토 의장과 대립해 발표 직전에 공동 선언문이 폐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공산당이 중국공산당과 관계정상화 한지 14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조선로동당과는 1972년 이후 관계단절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1979년 한국-쿠웨이트, 국교수립

1979년 6월11일 쿠웨이트가 한국과 국교(國交)수립을 단행했다. 한국은 이에 따라 1990년 8월 이라크 철군을 요구하는 다국적군에 의한 걸프전쟁에 참가, 5억 달러의 지원금을 부담하고 군의료진 200명과 수송장비 및 장병 150명을 파견했다.

1991년 주한 쿠웨이트 대사관이 개설됐고, 1982년 항공협정, 1983년 문화협정, 1984년 경제기술협력 및 무역증진협정,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이 체결됐다. 2000년에는 과세방지협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주요 수입품은 중화학공업제품, 경공업제품, 식료 및 직접소비재 등이고, 수출품은 석유, 석유화학품, 가스, 광물, 화공품 등이다.

군주제 국가다. 군주를 ‘아미르(토후(土侯)’로 부르는데, 유럽에서 ‘공(公)’ 또는 ‘대공”(大公)’에 해당한다.

쿠웨이트는 걸프 아랍국에서는 유일하게 명실상부한 의회를 보유하고 있다. 군인과 공무원, 여성의 참정권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쿠웨이트에서는 정당 결성이 금지되고 있으나 각각의 계층을 대변하는 정치단체가 6개 이상 존재하고 있으며 1997년부터 온건파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정치 운동 단체결성을 시도했다.

1999년 자베르 국왕이 총선에서 대승했고 야당의 개혁파가 의회를 장악했다. 쿠웨이트는 당초 2003년부터 여성에게 투표권 및 피선거권을 부여할 계획이었으나 1999년 11월 의회에서 부결되었고 2005년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됐다.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쿠웨이트 국민의 85%(수니파 70%, 시아파 30%)를 차지한다. 좁은 땅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 유전에서 세계 석유의 10%가 매장돼 있다. 석유로 경제가 한때는 세계 제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기록하기도 했다. 현재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자나라다.

기간산업이 석유다. 전 세계 석유자원의 7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석유산업 국유화를 강력 추진, 1975년 쿠웨이트 석유회사를 설립하는 등 쿠웨이트 자본이 대부분이다. 국가수입의 90%를 석유수출로 충당하며, 석유 한 가지만으로 국민소득을 올리고 있다.

1971년 리비아, 대만과 단교 중국 승인

1971년 6월11일 리비아 대통령 카다피가 대만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중국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대만 63개국, 중국 62개국이었던 수교국가 수(數)가 하루 만에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대만을 지지했지만, 실리적으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타진하고 있었다.

그 해 4월에는 탁구 선수단을 중국에 보내 이른바 ‘핑퐁 외교’의 물꼬를 텄고, 6월에는 대(對)중국 금수조치 해제를 단행, 화해 제스처를 내비쳤다.

중국은 각국과의 수교 여세를 몰아 유엔가입을 추진했다. 10월25일 제26차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가입과 대만의 유엔축출을 명시한 이른바 ‘알바니아안(案)’이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됐다.

중국이 건국 22년 만에 세계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대만 대표는 표결에 앞서 유엔탈퇴를 선언하고 대회장을 떠났다.

1963년 베트남 승려 불교탄압 항의 분신자살

1963년 6월11일 베트남의 승려 틱꽝득(Th?ch Qu?ng Ð?c, 1897년 출생)이 남베트남의 불교 탄압 정책에 항의하면서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분신자살했다. 화염 속에서도 전혀 표정의 일그러짐 없이 정좌자세로 조용히 죽음에 이르는 승려 틱꽝득의 모습은 지구촌 전체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한편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진누의 부인 누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틱꽝득의 죽음을 “땡중의 바베큐 쇼”라고 망언을 했다. 베트남 국민과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대통령까지 분노했다.

불에 탄 시신을 수습해 화장을 했는데, 틱꽝득의 심장은 손상되지 않은 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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