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6일] 사르코지, 5년만에 승자에서 패자로
2007년 佛 대선 승자 사르코지, 재선 실패하다
2007년 5월6일(현지 시각) 치러진 프랑스 대선에서 성장과 개혁, 외교에선 친미(親美)를 내세운 중도 우파 대중운동연합 (UMP)의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후보가 당선됐다.
사르코지는 전체 유권자 4450만 명이었던 당시 대선 2차 투표에서 53.06%의 득표율로 분배와 평등을 강조한 중도 좌파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Royal·46.94% 득표)을 누르고 새 대통령이 됐다. 장시 대선 2차 투표AAAA율은 83.97%로, 프랑스에서는 1988년 대선 이래 최고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꼭 5년이 지난 2012년 5월6일 오전 8시(현지 시각, 한국 시각 오후 3시) 프랑스는 또 대선 결선(2차)투표를 치렀다.
지난 4월22일 1차 투표에서 1, 2위를 한 사회당 올랑드 후보와 대중운동연합(UMP)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각각 28.6%와 27.2%의 득표율로 1,2위를 차지했다. 현직 대통령이 1차 투표에서 1위를 놓친 것은 프랑스 역사상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유권자 수는 5년 전과 거의 비슷한 약 4450만 명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전국 6만5000곳 투표소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이에 앞서 해외 거주 프랑스인 108만 명도 5월5일부터 각국 780곳의 투표소에서 투표를 실시했다.
올랑드는 유로존과의 긴축 조치 합의를 전면 재협상하고 부자들에게 소득의 75%를 세금으로 물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반면 사르코지는 강한 프랑스를 내세워 자신이 경제위기 해결의 적임자라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이변은 없었다. 각급 여론조사 결과에서 예측했던 대로 올랑드가 선승을 거둬 프랑스에서는 17년 만의 좌파 정권 탄생했다.
2002년 버마 수지 여사, 가택연금서 해제
버마 민주민족동맹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의장 아웅산 수지여사가 2002년 5월6일, 19개월간의 가택연금에서 풀려났다. 지난 2000년 9월 NLD 회원들과 수도인 랭군을 벗어나 버마 북부로 가는 기차에 탑승하던 중 체포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다른 NLD회원들도 상당수 감금됐다.
수지 여사는 1988년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뒤 이듬해인 1989년부터 6년 동안 한차례 연금 된 적이 있다. 가택연금으로는 이번이 두 번째인 셈. 1990년 총선 때에는 연금중임에도 불구하고 80퍼센트 이상의 의석을 휩쓰는 저력을 발휘했다. ‘선거의 여왕’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지지하는 버마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을 보여주는 예다.
여사는 미얀마에 대한 경제 제재가 풀리고 국제원조와 투자가 원활할 수 있도록 군부에 최대한 협조할 계획을 누차 밝혔다. 그 대가로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보장하는 동시에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가 압승을 거둔 1990년 총선 결과를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1942년 맥아더의 패배, 比 코레히도 전투
1942년 5월6일 오후 1시30분 필리핀 코레히도 섬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던 당시 미국-필리핀 연합군 소속 2명의 장교가 일본군 진영에 도착했다.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보낸 그들은 항복을 상징하는 ‘백기(白旗)’를 일본군에게 전달했다.
일본은 1941년 진주만을 기습한 뒤 곧바로 코레히도로 눈길을 돌렸다. 마사하루 홈마 일본군 대위는 이에 앞서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3월엔 바탄, 4월엔 코레히도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한다. 5월6일 마침내 당시 맥아더의 지휘를 받아 이 지역사령관을 맡고 있던 웨인라이트(Jonathan M. Wainwright)는 항복했다.
연합군 사령부가 있던 코레히도(Corregidor)섬의 모양이 올챙이(tadpole)와 비슷해서 사람들은 ‘올챙이섬’이라고도 불렀다. 남지나 해변쪽의 머리부분부터 마닐라쪽의 꼬리부분까지 전장 길이가 약 6.4㎞이고 최대폭이 800미터, 최고지점이 200미터인 약한 암반석의 화산섬이다. 총면적 약 7.8㎦의 작은 섬으로서 마닐라까지 약 41.6㎞이고 카비테 시(市)까지는 약 16㎞다.
마닐라 만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옛날부터 전략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섬. 스페인 통치시대 때부터 이곳은 종요한 입국을 관리 심사했었고 2차 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장중 하나였다. 18세기의 스페인 통치시대에는 해적의 진입을 차단하는 세관역할을 했던 곳. 코레히도는 스페인어로 ‘엄하게 다스리는 집행자’라는 뜻이다.
필-미 연합군 입장에서도 코레히도 섬을 사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엇갈렸던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군이 점령, 1922년에는 터널 요새로 유명한 마린타 터널이 완성됐다. 1941년 미일 전쟁 도발 전까지 섬 전체가 완벽하게 요새화됐다.
연합군이 항복했던 1942년 5월, 일본군이 항복했던 1945년 2~3월 격렬한 전투가 이곳에서 전개됐다. 연합군이 일본군 포로수용소를 공격할 때에는 약 6000명의 일본군 수비대 중 생존자가 고작 20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연합군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섬 내부의 대부분의 동식물이 초토화 돼 “생물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라고 전해질 정도였다. 맥아더는 코레히도 섬을 도망치면서 “나는 다시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는 말을 남겼다.
맥아더는 그 뒤 1944년 10월 20일 비사야스지역의 전략요충지였던 레이떼섬에 대한 3단계 초토화 작전(전투기 폭격, 함포사격, 해병대 상륙)을 통한 상륙을 성공적으로 수행, 일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듬해인 1945년 1월22일 일본에 빼앗겼던 코레히도를 마침내 되찾는다.
1942년 3월 바탄전투 패배 후 한 달여 만에 또 코레히도를 잃은 뒤 일본군 전쟁포로가 됐던 웨인라이트(Jonathan M. Wainwright)는 연합군의 승리 뒤인 1945년 9월2일 일본군의 항복문서 조인식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귀국 후 장군으로 승진하면서 명예훈장도 받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바로 눈앞에서 물리쳐 준 맥아더와 미국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받고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