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와 ‘죽음 그리고 죽어감’
[아시아엔=박종구 tbs 서울교통방송 전 대표] 최근 갑작스러운 부음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디서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에서처럼, 현대인에게는 이제 죽음보다 죽어감의 과정이 더 중요해진 것 같다.
그래서 만성퇴행성 질환이나 장기적인 투병보다 차라리 짧고 간결한 죽음을 원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듯이, 병이 길어지면 가까운 가족조차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곁을 지켜주기가 쉽지 않다.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아무르>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자 죽음에 관한 영화다. 죽음을 통해서만 온전히 발현되고 증명될 수 있는 사랑, 또는 사랑에 의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죽음이 있음을 말해주는 영화다. 어떤 희망이나 서사적 전환도 없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는 죽어가는 자의 얼굴을 담담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비추고 있다.
제자의 연주회에 다녀온 노부부는 누군가 문을 따려던 흔적을 보며 무심코 도둑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해 봐. 난 싸우다가 죽었을 걸.” 아내 안느의 이 농담은 결국 도둑처럼 들이닥친 질병과 죽음에 대한 예언이 되고 만다. 이처럼 질병은 평온한 일상에 불현듯 찾아와 살아 있는 물기와 온기를 서서히 거두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질병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다. 고작해야 병원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것이다. 안느가 식사하다가 갑자기 멍해지는 증상을 보이자 남편 조르주는 그녀를 병원에 데리고 간다. 안느는 결국 뇌졸중으로 오른쪽이 마비된 몸으로 집에 돌아온다. 그녀는 남편에게 하나만 약속해 달라고 부탁한다.
“다시는 날 병원에 보내지 마.”
이 말은 인간다운 존엄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게 해달라는 청원일 것이다. 생명의 연장이나 통증의 완화를 위해 병원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처치에 자신을 더 이상 내맡기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 영화에 병원 장면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지루할 정도로 두 사람이 사는 아파트 내부가 줄곧 배경이 될 뿐, 회상을 통해서라도 그 공간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그 갇혀 있음, 벗어날 수 없음 자체를 힘주어 말하려는 듯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집의 대립항으로 병원이라는 공간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현관, 거실, 부엌, 침실, 욕실을 오가며 하루하루 진행되는 노부부의 조용한 사투. 두 사람은 그야말로 죽음의 공동체가 돼 질병과의 무력한 싸움을 해나간다.
과연 존엄한 죽음이란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존엄한 삶 못지않게 존엄한 죽음을 원한다. 하지만 질병은 그런 염원을 무참하게 만들어버린다. “점점 나빠지겠지. 그러다 끝이 나겠지”라는 안느의 말처럼, 죽어가는 과정이란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채 다가오는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수동적 경험에 가깝다.
전동휠체어를 다루는 법을 익히고, 걷기 연습을 하고, 발음 연습을 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이런저런 재활의 노력을 해보지만, 죽음은 결국 복도에 물이 흥건하게 차 들어오듯 도래하고 만다.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는 지경이 될 때까지 죽음은 삶을 침식해 들어온다. 이때 죽음을 향해 내던져진 자의 고독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가 없다.
안느가 더는 주체할 수 없는 신음소리를 내자, 조르주는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잖아”라며 열 살 때 캠프에 갔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게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그들에게는 길고 고통스러운 죽어감의 과정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결국 조르주는 베개로 아내의 얼굴을 눌러 질식사시키고 자신도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을 살인이라고, 범죄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목숨을 끊어주는 것이 그가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