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30일] 캄보디아 ASEAN의 10번째 회원국 된 날

2010년 CIA ‘천황 감시’ 미 비밀문서 공개

2010년 4월30일 일본 <도쿄신문>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히로히토 일왕을 주시해왔음을 보여주는 기밀문서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도쿄신문>은 미 국립공문서보관소가 29일 공개한 중앙정보국 기밀문서 가운데 ‘히로히토(HIROHOTO)’라는 제목의 문서들이 발견됐다며, 이는 미국이 개인 파일을 만들어 일왕의 대미 감정이나 상징천황제의 일본 내 정착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문서는 1971년7월부터 1989년1월 히로히토 일왕 사망 때까지 작성된 것으로 모두 13장이다. 1971년 문서에는 “일왕은 국내의 치안문제나 국제 사회의 사안에 대해 폭넓은 식견을 갖고 있다”, “일왕은 친밀한 미일관계가 계속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또 같은 해 가을 일왕의 유럽 방문에 대해 “재위 중인 왕의 첫 외유”라고 주목하고, “일왕은 프랑스어에 약간 지식이 있고, 사전의 도움을 빌어 영어를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등의 내용을 기록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문서가 작성된 때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전격 중국을 방문하기로 하는 바람에 미일관계가 서먹해져 있던 시기였다. 닉슨이 1971년 앵커리지에서 유럽 방문길에 오른 일왕을 영접하고 회견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 ‘왕실 외교’를 준비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1980년 7월에 작성된 문서는 일왕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 1975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회견했을 때 일왕의 태도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999년 캄보디아 ASEAN의 10번째 회원국 가입

1999년 4월30일 캄보디아가 동남아시아 국가연합(東南-國家聯合,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의 10번째 멤버로 가입했다. ASEAN은 1967년에 설립된 동남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공동체로 매년 11월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아세안은 현재 거대한 공동체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1967년 8월 8일 태국 방콕에서 창설된 아세안은 오는 2015년까지 유럽연합(EU)과 맞먹는 정치·경제 통합체를 지향하고 있다. 아세안은 2008년 12월15일 지역공동체의 헌법 구실을 하게 될 역사적인 ‘아세안 헌장’을 발효시켰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아세안은 앞으로 EU처럼 단일 공동체로서 통합하는 절차를 단계적으로 밟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 국제해양법조약 채택

1982년 4월30일 유엔해양법회의가 국제해양법조약을 채택, 이때부터 국제적으로 영해 12해리와 배타적경제수역 200해리가 인정됐다.

유엔의 주도 하에 해양법회의가 열린 것은 1958년이다. 당시 제1차 해양법회의에서는 영해, 공해의 생물자원 보존·대륙붕에 관한 협약이 채택됐고, 대륙붕의 영유권은 대륙붕이 시작된 나라에 귀속시켰다.

1960년에 〈제2차 유엔해양법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영해의 범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성과 없이 끝났다.〈제3차 유엔해양법 회의〉는 1973년 개최된 이래 10년 간 계속됐다. 많은 국가가 영해를 3해리로 채택하지만 연안국의 권리보호 요구가 계속적으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82년 4월30일 열린 제3차 유엔해양법회의에서 국제해양법조약을 채택, ‘영해 12해리’와 ‘배타적경제수역(EEZ) 200해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0일 자메이카의 몬테고베이에서 17장 320개 조로 구성된 <유엔해양법협약>과 9개의 부속서 및 <제3차 유엔해양법협약 최종의정서>로 구성된 부속문서를 채택했다. 그 뒤 14년이 지난 1994년 11월16일 각국이 비준을 거쳐 이 협약이 발효했다. 이를 계기로 세계 각국은 영토경계의 획정 및 다양한 형태의 어업관리를 활발하게 시행하기 시작했다. 한국도 이듬해인 1995년 배타적경제수역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고 다음해 이를 선포했다.

1975년 사이공 함락, 베트남 전쟁 종결

1975년 4월30일 아침 소련과 중국이 제공한 무기로 무장한 공산 북베트남군(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군)이 남베트남(월남)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했다.

이날 오전 10시30분 남베트남 대통령 두옹 반 민이 무조건항복을 결정, TV를 통해 정부군 병사에게 전투 중지를 명령했다. 오후 12시30분(한국시간 1시30분) 해방전선기가 대통령 관저에 게양되면서 3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의 종결을 고했다. 16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이 완전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진입한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은 텅텅 비어 있었다. 남베트남군은 물론 미군도 얼마 전 완전히 이곳을 포기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4월 17일에는 인접국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해방군 세력에 넘어갔다.

사이공 함락하고 베트남을 통일한 북베트남군은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운다.

4월28일 사이공 시민의 기대를 받고 등장한 두옹 반 민 신임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즉각 정전, 평화교섭 즉시 재개 등을 제창했지만 해방세력은 공항과 사이공 폭격으로 대답했다.

종전 하루 전인 4월29일 미국 대사관은 폐쇄됐다. 대사관 직원들은 헬리콥터로 탈출했다. 베트남전에 종지부를 찍은 미 국방부는 이 전쟁에서 미군 사망자수는 약 6만 명, 약 1390억 달러를 전비로 썼다고 발표했다.

병력을 파견해 남베트남을 지원했던 한국은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17년 만인 1992년에야 베트남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45년 히틀러 자살

1945년 4월30일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정부(情夫) 에바 브라운(Eva Braun)이 동반자살했다.

소련군이 베를린 총독 벙커 부근까지 육박해온 이날 히틀러는 황금권총으로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총격을 가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40시간 전에 결혼식을 올렸던 33세의 브라운은 청산칼리를 마시고 현장에서 함께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히틀러를 처음 만난 것은 1929년 당시 뮌헨에서 사진관 견습사진사 겸 모델로 일할 때였다. 상냥한 인상에 파란 눈을 가진 17세 소녀는 기꺼이 정계 거물 히틀러의 놀이상대가 됐다. 그러나 그녀는 진지했다. 두 차례 자살소동 끝에 히틀러를 붙잡았다. 드러낼 수 없는 신분 탓에 알프스 산록의 히틀러 산장에서 거의 혼자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히틀러는 유서에서 칼 되니츠 제독을 국가수반으로, 요제프 괴벨스를 총통으로 지명했다. 그의 유서에는 “나는 결코 전쟁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전 생애를 독일 국민을 위해 바쳤다”고 적혀 있었다. 되니츠는 라디오 연설에서 “볼셰비키 적들로부터 독일을 지켜내겠다”고 말했으나, 허언임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되니츠의 독일은 5월8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반면 괴벨스는 히틀러의 유언을 따르지 못했다. 괴벨스 부부 역시 그들의 여섯 아이들을 죽인 뒤 자살했기 때문이다.

1865년 영국의 기상학자 피츠로이 자살

1865년 4월30일 영국 해군 장교로 기상학자인 피츠로이([Fitzroy, Robert, 1805년7월5일 출생)가 자살했다.

피츠로이는 영국 기상청의 초대청장으로, 국가기관이 세계최초로 공식 일기예보를 발표하도록 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기예보는 틀렸고, 여론의 조롱거리가 됐다.

일기예보를 틀리는 것이 일상화 된 2012년과 달리 그는 일기예보에 틀렸다는 자책감 때문에 우울증을 앓게 됐고, 결국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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