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일] 친일파 재산, 국가 귀속

2007년 친일파 토지 36억 국가 귀속

2007년 5월2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18차 전원위원회를 열고 친일반민족 행위자 9명의 소유 토지 154필지, 25만4906㎡, 공시지가 36억 원 상당의 친일재산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재산 환수 대상자는 한일합병조약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과 그의 아들 이병길, 일진회 총재를 지냈던 송병준과 그의 아들 송종헌이 포함돼 있다. 중추원 고문이었던 고희경, 을사조약 당시 농상공부대신이었던 권중현과 그 아들 권태환, 한일합병의 공으로 남작 직위를 수작했던 이재극, 자작수작ㆍ중추원 고문등을 역임했던 조중응 등도 포함됐다. 전원위 9인이 전원 찬성 의결했다.

전원위는 국고 귀속 결정된 재산을 재정경제부(2012년 5월 현재 기획재정부)에 통보해 ‘나라’ 명의로 등기한 뒤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의 예우 및 생활안정을 위한 지원금, 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에 우선적으로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환수 대상이 된 친일재산은 러일전쟁 시작(1904년)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ㆍ증여받은 재산 등이다. 제3자가 선의로 취득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주고 취득한 경우는 제외됐다.

위원회는 이날 국가귀속 결정의 대상자들이 일제시대 사정받았던 토지가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과 임야조사사업(1916~1924년) 기준으로 모두 3994만6266㎡인 것으로 추정, 이 중 전체의 0.64%를 국가로 귀속시켰다고 밝혔다.

이번 첫 국가귀속결정은 1949년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활동이 좌절된 지 58년 만에 얻는 친일청산의 첫 가시적인 성과로 해석됐다. 전원위는 이미 환수대상이 된 인물들의 경우에도 추가 조사를 통해 친일재산이 확인되면 추후 귀속결정을 추가로 내릴 수 있으며 다른 친일 반민족행위자에 대해서도 절차를 밟아 국가귀속 작업을 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결정에 불복한 후손들은 통지받은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행정심판 및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2006년 7월 발족한 친일재산조사위는 대통령 직속 4년 한시기구(2년 연장가능)로서 지금까지 17차례에 걸친 전원위원회를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토지 400만평 정도를 찾아내 조사개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법무부 국가송무과 자료에 따르면 친일파들은 귀속 면적의 80%가 넘는 836만5287㎡(921필지), 공시지가 기준 610억원에 이르는 땅에 대해 행정소송을 냈다.

여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민영휘, 이정로, 민병석 등의 후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재산을 환수할 수 있는 근거였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소급입법 및 연좌제 금지 등을 규정한 헌법에 위배된다며 7건의 헌법소원까지 내기에 이르렀다.

2003년 中잠수함 사고로 70명 사망

2003년 5월2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 산둥(山東)성의 얀타이(煙台) 해군기지에서 중국 잠수함 사고가 발생, 탑승했던 70명 전원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잠수함은 사고 당시 훈련중이었다”면서 “함체에서 발생한 기술적 결함 때문에 70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사고 잠수함이 이미 해군기지 항구에 예인됐다”는 언급 뿐 사고 시점은 ‘최근’으로만 밝혔다. 당시 중국은 해군사령관을 비롯해 최고위급 간부 4명을 전원 면직 조치했다. 사고가 난 361호 잠수함은 재래식 공격용 잠수함으로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중국이 잠수함 사고를 공개한 것은 인민해방군 창설 이래 처음이었다고 한다. 또 중국은 1000t급 잠수함 70여척(이중 5척은 핵잠수함)을 보유, 아시아 최대의 잠수함 강국으로 부상했다는 설명이다. 미국 본토까지 도달하는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실험도 성공했다. 당시에는 2010년도 초반에 미국의 잠수함 전력에 어깨를 견줄 것으로 전망되기도 했다. 중국이 제해권 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해역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의 지시마(千島) 열도에서 일본 본토와 대만, 필리핀, 베트남 해역까지를 포함한다.

1998년 엑스 재팬 기타리스트 히데 의문사

1998년 5월2일 아침 일본의 전설적 록밴드 ‘엑스재팬’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인 ‘히데’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전문의의 최종 부검 소견은 ‘기도폐쇄로 인한 질식사’였다.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엑스재팬은 항상 신화를 기록하는 밴드였다. 일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한 공연에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야 하는 도쿄돔 라이브를 3일 연속 성공시켰다. 발매되는 앨범마다 히트했다.

기타와 작곡, 보컬을 맡았던 히데는 팀의 리더 요시키와 함께 엑스재팬의 ‘양대 카리스마’로 불렸다. 붉은 머리와 짙은 화장, 마른 몸매에서 뿜어내는 강렬한 카리스마는 소년 시절 비만 콤플렉스 때문에 내향적이고 얌전한 아이였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 록그룹 키스의 앨범을 처음 듣고 록에 눈을 뜬 히데는 로커들의 가죽바지를 입기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를 했다고 한다.

2008년, <Hide Memorial Summit> 라는 타이틀로 추모 콘서트가 개최된다. 히데는 함께할 수 없었지만 요시키는 신곡 ‘I.V.’에 히데의 생전 기타 연주를 사용했다. 히데의 생전 연주 모습을 홀로그램 영상으로 상영, 그가 환생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 장면이 연출됐다.

1994년 만델라, 대통령 당선


1994년 5월2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만델라는 1944년부터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참여했고,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됐다. 1960년 스하르페빌레에서 비무장 군중들이 상해를 입자 만델라는 비폭력 노선 대신 대(對)정부 사보타주를 역설했다. 1962년 투옥 후 재차 소추된 ‘리보니아 재판’이 열렸고,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아 1990년 2월까지 약 27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과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적 압력으로 1990년 2월 F. W. 데 클레르크 정부는 만델라를 석방했다. 같은 해 3월 만델라는 ANC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94년 4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만델라가 약 65%의 지지율을 얻어 당선, 46년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는 막을 내렸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사람을 인종등급으로 나눠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 등으로 분류했다. 인종별로 거주지분리, 통혼금지, 출입구역분리 등을 제도화 했다. ‘차별이 아니라 분리에 의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사상 유례가 없는 노골적인 백인지상주의 국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국제사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치하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FIFA 월드컵과 올림픽 참가를 금지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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