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공원국의 SNS ‘세가지 질문’
[아시아엔=공원국 역사·여행작가, <춘추 전국이야기> <유라시아 신화기행> <나의 첫 한문 공부> 등 저자] 종이신문을 안 본 지 좀 오래되었지만, 페이스북을 시작한 후 포털 사이트의 신문란도 잘 보지 않게 되었다. 페이스북 친구, 소위 페친 중 누군가가 내가 보고 싶은 기사를 꼭 집어내어 링크를 걸고는 기가 막히는 논평까지 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사회연결망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세월호가 가라앉은 직후였다. 당시는 참을 수 없는 격정 때문에 격문(檄文)을 써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격문을 써대는데, 그걸 나르는 수단으로 페이스북이 그렇게 효과적이고 간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파미르고원에서 현지조사를 하며, 거기에 상수도를 설치했는데, 자금 조성부터 마무리 보고까지 모두 페이스북 서비스를 이용했다. 가끔 이 서비스는 열 사람 몫을 거뜬히 해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페이스북에 올려진 내 페친들의 글 혹은 링크를 볼 때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데’ 하는 기시감이 드는 것이다. 확인해보면 같은 글이나 같은 기사는 아니었지만, 대단히 비슷한 것은 사실이었다. 비슷한 글을 읽는 효과도 뚜렷이 나타났다. 어떤 사건을 대할 때, 내가 먼저 보았던 의견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자주 듣던 의견이 주류일 것이라 지레짐작도 했을 것이다. 순간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작가는 매우 특이한 존재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 안에 있는 가장 불편한 것을 굳이 꺼내서, 그것을 해체한 후 다시 조립하는 이들이다. 상품으로 소비되는 모든 것들을 자기 손으로 역분해(逆分解)하지 않고는 글을 써낼 수 없다. 그 역분해 과정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
이렇게 물을 자격을 얻기 위해, 작가는 사회적으로는 지배적인 체제가 강요하는 익숙한 관계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특정한 관계에 종속되어서도 안 되고, 정신적으로는 어떤 익숙한 의견에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작가가 껄끄러운 의견을 보이는 이는 친구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보지 않을 수 있고(팔로우 취소),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친구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수도 있다(친구 끊기)구? 사실은 처음부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을 골라 친구관계를 맺었다. 과연 거대한 동호회원들에 둘러싸인 한 작가가, 익숙해져서 들여다보기 버거운 관계들을 역분해할 수 있을까?
이미 내(我)가 된 이들과 ‘저들(彼)’을 철저히 구분하면서, 오직 나의 입장에서 ‘저들’만 역분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페이스북 계정은 ‘저들’에게 멋지게 포를 날릴 진지인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 때,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영화 <조조 래빗>을 보러 갔다.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때, 게슈타포의 감시가 극에 달하던 나치 통치하의 독일. 조조의 어머니 로지는 “자유독일”이 쓰인 자그마한 유인물을 몰래 뿌리며 세상을 바꿀 ‘관계’를 찾아 나선다. 그 관계 만들기는 그녀만의 레지스탕스다. 그러나 로지는 전쟁이 끝나 나치의 전제주의가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발각되어 교수형을 당한다. 그녀는 나치체제와 전쟁이 강요한 관계를 역분해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창조자, 즉 작가였다. 땅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맴도는 그녀의 애처로운 두 발이 역분해의 어려움과 새로운 관계 맺기의 엄중함을 웅변한다.
끊고 싶어도 스스로 끊을 수 없고 맺고 싶어도 스스로 맺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의 관계다. 그것은 철저히 상호적이고, 그것이 창조적일수록 책임은 무거워지고 결과는 항상 위험하다.
이제 작가로서 내가 다시 물어볼 차례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서 어떤 관계를 만들고 있나, 그리고 너는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