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5일] 세계 말라리아의 날
2008년 제 1회 세계 말라리아의 날
2008년 4월25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세계 말라리아의 날’을 맞아 아시아를 비롯한 지구촌 대부분의 나라에서 말라리아의 퇴치(Counting Malaria out)를 위한 각종 캠페인이 벌어졌다.
‘세계 말라리아의 날’은 WHO 창립 60주년인 2007년 지정했고, 이듬해 4월25일 제 1회를 맞았다. 저소득 국가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절반이 말라리아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효과적인 말라리아의 관리 및 퇴치가 세계적인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제정됐다.
WHO는 당시 “말라리아로 매년 5억의 인구가 감염되고 있고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지역이 가장 극심하지만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유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직도 지구촌 영유아의 목숨을 앗아가는 3대 질병 중 하나다.
WHO는 2010년까지 7억 개 이상의 모기장, 2억 도스(dose) 이상의 말라리아 치료약물, 2억 가정을 위한 스프레이 모기약이 필요하고 매년 15억 개의 진단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말라리아는 충분히 예방·치료할 수 있는 질병. 치료약을 처방받고 잘 먹이면 살 수 있지만, 경제 상황이 열악한 아프리카와 동남아에선 아이들의 영양상태도 좋지 않아 면역력이 약해져 있는 탓에 살려내기가 어렵다. 이 지역에서 모기장을 통한 말라리아 예방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한국 구세군과 함께 말라리아 예방 모기장 지원에 나선 김도형 베스터가드 프란센 아시아지사장(사진)은 25일 아시아엔(THE AsiaN)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에게 모기는 조금 귀찮은 일이지만 생명의 위협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면서 “1만 원짜리 모기장 한 세트면 5인 가족이 4년 동안 보호받을 수 있으니, 나눔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구세군은 25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0여 곳에서 자선냄비 모금 활동을 진행하고 5월 한 달 동안 온라인과 후원계좌 입금 등 다양한 방법으로 모기장 구입할 성금을 모금할 방침이다.
다음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2012년 ‘세계 말라리아의 날’ 성명서 발표 동영상.
2008년 한국 국보 1호 숭례문 방화범 징역 10년 선고
2008년 4월25일 한국의 법원은 같은 해 2월10일 한국의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에 불을 지른 70대 노인에게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이경춘 부장판사)는 이날 숭례문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기소된 채모(70)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행으로 소실된 숭례문은 여러 환란을 거치면서도 장고한 세월을 견뎌 온 유산중의 유산”이라며 “숭례문이 복원되더라도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어 국민들의 상처가 쉽게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서 범행의 내용과 결과가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피고인은 2006년 창경궁 방화로 이미 법원의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집행유예 기간 중 숭례문에 또 불을 지른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반사회적 행위라는 게 법원의 시각이었다. 재판부 그러나 “사전에 화재를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대책이 있었더라면 숭례문이 전소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숭례문 소실의 책임을 모두 피고인에게 돌리기는 어렵다”면서 문화재 보호 관계기관에도 일부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채씨는 2012년 4월25일 현재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정부는 2008년 4월24일 봉안된 상량문에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소홀하게 방치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2005년 일본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사고
2005년 4월25일 오전 9시18분경(일본 표준시) 서일본 여객철도(JR 서일본) 후쿠치야마 선(JR 다카라즈카 선) 쓰카구치(塚口)~아마가사키(尼崎)역 사이에서 열차가 탈선, 차량이 인근 아파트에 충돌해 승객 106명과 운전기사 1명 등 총 107명이 사망했다.
사고열차는 쓰카구치~아마가사키역 간의 곡선부에서 탈선, 앞쪽 2량이 선로변의 아파트에 충돌했다. 이 열차는 출발역인 다카라즈카역에서 회송 때 ‘자동열차정지장치(ATS)’가 작동, 긴급 정지하는 일이 발생했다. 또 사고현장 직전의 정차역인 이타미 역에서도 정차위치를 통과(Over run)했었다.
1915년 터키, 갈리폴리에 상륙한 영국군 격파
1915년 4월25일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터키령 다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Gallipoli)’에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 군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쳤다. 상륙군은 그러나 해안에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한 터키군의 완강한 저항에 되레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곰PD의 전쟁이야기>에 따르면, 1914년 1차 대전 발발 당시까지 중립을 지켰던 터키는 오랜 적대관계였던 러시아가 참전하자 곧 독일편에 선다. 영국은 당초 불과 몇 주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영국은 고민에 빠졌다.
독일은 터키와 새로 동맹을 맺고 군사고문단까지 파견, 터키군의 근대화를 꾀했다. 40개 사단의 정규군을 갖추는 등 터키의 군사력이 증강되자 불안감이 더해졌다. 더 이상 터키군의 성장을 방치했다가 러시아 전선이 위협 받게 될 것을 우려한 영국은 터키에 군대 투입을 결정한다. 터키를 패배시켜 독일과의 동맹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하고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지원한다는 것이 작전의 큰 목적이었다.
실질적인 계획을 입안한 것은 당시 내각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 그는 영국과 프랑스 함대를 다다넬즈 해협을 통해 터키 수도 이스탄불로 진격시키는 작전계획을 내각에서 관철시켰다. 함대가 이스탄불로 가기위해서는 좁은 다다넬즈 해협 양 편에 구축된 터키군 해안 포대와 진지들을 먼저 무력화 시켜야 했다. 처칠은 오래전부터 육군과 해군의 긴밀한 합동작전만이 다다넬즈 해협을 확보할 수 있다는 보고를 수차례 받고도 해군력만으로 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1915년 2월19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 함대가 터키군의 요새를 공격했지만 터키군 격파하지 못했다. 3월18일에는 작전에 참가한 16척의 전함 중에 5척이 침몰되거나 대파되는 수모를 겪었다. 영국 해군의 ‘피셔’ 제독은 무리한 작전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임했다. ‘처칠’도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났다.
탄약고갈 등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던 터키군은 영국 해군 지휘부의 퇴진으로 한숨 돌렸다. 영국은 육해군 합동작전을 구상했고, 오스트렐리아와 뉴질랜드군을 주축으로 한 영연방군과 프랑스군 등 7만의 원정군이 갈리폴리에 상륙을 시작했다. 최초 공격일로부터 무려 6주일이나 지난 후인 4월25일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탄약과 인력을 재정비한 터키군 8만5000명이 다다넬스 해협에 집결해 영연방군을 압박 타격, 영연방군은 곧 해안에 고립됐다. 특히 훗날 터키 대통령이 되는 ‘케말 무스타파’ 대령이 이끄는 터키 제 19사단이 영국군을 좁은 해안에서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영국군이 추가 상륙을 시도 할 때마다 휘하 병력을 조금씩 쪼개어 할당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작전은 적중했다. 영국군은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 상태에 빠졌다.
이후 3개월간 영국군은 3차에 걸친 대공세를 펼쳤지만 추누크 베어, 사리 베어 지역의 높고 험한 언덕에 참호선을 따라 배치된 터키군의 기관총에 무수한 병사들이 죽어갔다. 8월에도 3개 사단을 추가로 상륙시켜 공격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영국 중동원정군 사령관 ‘해밀턴’ 장군이 해임됐다. 결국 이듬해인 1916년 1월 영국군은 갈리폴리에서 철수해야 했다.
영연방군 전사 및 부상자는 25만 명, 터키군 전?사상자는 15만 명에 이르렀고, ‘갈리폴리 작전’은 오늘날까지 실패한 상륙전의 대명사로 기록됐다.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갈리폴리에서 8587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낸 호주는 상륙작전이 개시된 4월25일을 현충일(ANZAC Day,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Day)로 지정,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