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외쳤던 한항길 선생의 꿈이 담겨 있는 부천대학교
[아시아엔=이주형 기자]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 독립운동사에 족적을 남긴 열사들이 재조명 받고 있다. 1979년 부천공업전문대학(현 부천대학교)을 설립한 몽당(夢堂) 한항길 선생은 민족의 독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다.
1897년 인천에서 태어난 한항길 선생은 ‘한민족의 복을 일으켜 세우라’는 ‘흥리’(興履)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조부 밑에서 국가와 민족을 유교적 가치관과 정의감을 배운 한 선생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행진을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돼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의지를 놓지 않았고, 이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키운다’는 의미의 몽당(蒙堂)이란 호를 얻게 됐다. 선생은 또한 3.1운동에 참여한 공훈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받았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1999년 10월 1일엔 부천시를 빛낸 사람으로 선정됐으며, 2002년 6월 10일에는 부천 중앙공원에 선생의 추모공원이 건립 되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한항길 선생은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고, 교육자의 길을 선택해 1928년까지 교편을 잡았다. 한 선생은 1945년 독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본명을 ‘흥리’ (興履)에서 ‘항길’(恒吉)로 개명했는데, 여기엔 ‘대한민국이 항상 길하라’라는 민족적 염원과 국가의 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한항길 선생은 6.25전쟁 후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체와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1958년 소사공업기술학교(현 부천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78년, 한항길 선생은 그의 교육 철학을 보다 널리 전파하고 많은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위해 한길학원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3월, 그 노력의 결과인 부천대학교가 문을 열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선생은 개교 2개월 만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항길 선생의 큰 뜻을 담고 태어나 부천을 대표하는 대학으로 자라난 부천대학교에선 현재 4개 계열(공학계열, 인문사회계열, 자연과학계열, 예체능계열) 27개 학과에서 1만여 학생이 수학 중이다. 부천대학교는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기준치를 통과한 자율개선대학 중 한 곳이며, 정부가 지원하는 LINC+ 육성사업(사회맞춤형학과)에도 선정된 우수한 교육기관이다.
위와 같은 역량을 갖춘 부천대학교는 2019년 3월부터 4월 1일까지 조사된 ‘전문대학 브랜드 빅데이터 평판’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브랜드 평판지수는 브랜드에 대한 긍?부정 평가, 미디어 관심도, 소비자의 참여와 소통량 등으로 측정되는데, 이는 부천대학교를 향한 학생과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부천대학교는 지난 6월 ‘2019 한국의 혁신대상’에서 교육혁신 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산업표준 분류표에 근거해 산업별 동향을 조사한 후 전문가로 구성된 5인의 심의위원이 각 부문별 기업·제품·기술(서비스)로 분류·심사하는데, 부천대학교는 학생을 위한 교육환경 혁신, 취업지원·경력관리의 혁신지원 시스템 개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정석 부천대학교 총장은 이 상을 받으며 “부천대학교는 산업화, 정보화, 4차 산업혁명까지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배출하고자 끝없이 혁신을 거듭했다. 앞으로도 우리 대학은 혁신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항길 선생은 민족중흥의 기틀은 산업입국을 위한 우수한 기술인력 양성에 있다고 확신했다. 공업인이자 교육인이었던 그의 확신이 있었기에 ‘창의적인 기술인으로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라는 교훈을 지닌 부천대학교가 탄생할 수 있었다. 3.1운동의 한복판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우리 민족의 독립과 중흥을 바라던 지순(至純)한 소년의 꿈은 부천대학교에 고이 간직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