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 미르지요예프 대통령②] 카리모프 사후 88% 지지로 당선, 국가부흥 ‘앞장’
[아시아엔=조철현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저자] 카리모프의 국장(國葬)은 2016년 9월 4일 마무리됐다. 애도의 순간은 깊고 짧았다. 국부(國父)를 잃은 비통의 아픔을 가슴에만 묻어야 하는 절박한 시간. 우즈베키스탄으로서는 세계의 시선이 온통 자신들에게 쏠려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외신은 연일 카리모프 이후의 우즈베키스탄을 염려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갑작스레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미르지요예프(S. Mirziyoyev)로서는 이같은 우려를 불식시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 속에서 자신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카리모프 사망 후 4개월. 초대 대통령의 공백을 역동적으로 채워낸 미르지요예프는 12월 4일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88.61%의 압도적인 지지였다.
1957년 7월 의사 아들로 태어나
그는 1957년 7월 24일 지작(Jizzakh) 주의 자민(Zaamin) 지역에서 의사 아들로 태어났다. 자민은 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지작주 남부 소도시로 이 국립공원은 타지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명 관광지다.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보낸 미르지요예프는 1981년 수도 타슈켄트로 유학해 ‘타슈켄트 관개(灌漑) 및 농업 기계화 대학’을 졸업했다.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친 그는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이후에는 부총장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1990년 옛 소련 내 우즈베키스탄 최고회의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돼 33세의 젊은 나이에 정치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92년 독립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시 미르조 울루그벡(Mirzo Ulugbek)의 구청장을 맡아 1996년까지 4년 동안 중앙 무대에서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 시기 그는 헌법위원회 내 최고회의(Oliy Kengash) 구성원 자격으로 카리모프 대통령을 도와 우즈베키스탄의 헌법 제정 과정에도 참여했다.
“조국의 독립 초기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는 이슬람 카리모프 초대 대통령으로부터 높은 신뢰를 얻었다. 그는 카리모프의 사심 없는 동료이자 가까운 동료였다.”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실의 공보 자료로도 엿볼 수 있듯 30대 청년 시절부터 미르지요예프는 카리모프 대통령의 큰 신뢰를 받을 만큼 여러 분야에서 탁월했다. 그 결과 1996년부터 2003년까지 7년 동안 그는 고향인 지작 주지사와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인 사마르칸트 주지사를 맡아 보다 큰 행정 경험을 쌓아 나갔다. 같은 시기(1995~2003) 우즈베키스탄 의회의 의원직을 유지했다는 점 또한 그의 전방위적 활동을 보다 묵직하게 알리는 대목이다.
“지작과 사마르칸트 주지사로 있으면서 지역의 사회경제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1995~2003년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의 의원과 행정부 관료로 일하면서 민주개혁과 사회 경제 발전 관련 입법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우즈베키스탄 대통령 공보실)
2003~2016년 카리모프 대통령 내각에서 총리직 수행
이어 2003년 우즈베키스탄 총리에 임명된다. 그의 나이 45세. 집권 12년째를 맞고 있던 카리모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속에서 이루어진 총리 발탁은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일부에서는 카리모프의 후계 구도가 구체화됐다는 전망이 나왔고, 머지않아 카리모프가 권좌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오보까지 나왔다.
그로부터 13년. 우즈베키스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연평균 7~8%의 고도성장을 유지하면서 인구 3000만 시대를 돌파했고, 카리모프 초대 대통령의 입지 또한 건재했다. 그 변화 바람 속에는 늘 미르지요예프가 있었고, 그의 직책은 계속 총리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