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과 한국 대형교회의 ‘성장주의’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중세에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사흘 동안 눈밭에 엎드려 교황의 용서를 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망한 후 로마교황은 서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레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의 5대 대주교 관구 중 서방에 남은 것은 로마뿐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름만 남았다. 국가 권위가 붕괴한 유럽에서 로마교황이 유일한 권위로 남았다.
1077년 하인리히 4세가 주교 서임권 문제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 거슬렸다. 교황은 황제에게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파문형을 내렸다. 황제는 교황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눈밭에서 사흘을 빌었다. 로마교황의 영향력과 세속권력의 대결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우화다.
당시 가톨릭의 부패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잘 그리고 있다. 전 세계 추기경들이 모여 며칠을 고심 끝에 흰 연기가 피어나오는 오늘날의 엄격하고 경건한 선출과는 거리가 멀다. 교황 선출은 메디치가 등 주요 세력이 펼치는 궁정암투의 연속이었다.
천년을 지속해온 신성로마제국은 1805년 아우스테르리츠의 삼제회전(三帝會戰)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고, 나폴레옹은 그 황녀를 취한다. 지금까지의 유럽 왕가와 다를 바 없는 나폴레옹의 행태에 유럽은 분개한다.
폴란드의 민주화는 자유노조의 바웬사가 중심이나, 배경에는 집권자 야루젤스키 장군이 있었으며, 이것이 가능하기까지 고르바초프가 있었다. 동서냉전을 깬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수상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교황의 폴란드 민주화 기여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북한에 민주화의 틈을 낸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김정은 위원장도 스위스에서 공부했으니 교황의 권위를 알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북한이 세계로 나오는 길로 교황의 방문을 생각했을 터다.
국내에서의 보도와 달리 교황청은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교황청은 중국과도 관계 개선의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쉽게 진전되지 않고 있다.
개신교 신자 가운데 가톨릭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강영훈 전 총리도 가톨릭이었다. 강영훈은 육사 교장으로 5·16에 반대했으나 후에 박정희와 화해했다. 박정희는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한 강영훈을 불러들여 중용했는데, 그는 교황청 대사도 지냈다.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꽤 크다. 전철역 가운데는 총회신학대학이 있는 총신대역이 있고 아시아신학대학이 있는 아신역이 있다. 우당 이회영로가 있는 것과 같다.
유럽에서는 쾰른성당과 같이 수백년에 걸쳐 이루어진 성당도 있다. 개축되는 바르셀로나성당은 완성날짜를 모른다. 가톨릭과는 달리 너무 급히 올라가는 한국의 교회는 당대에 너무 많은 것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