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와 미 밴 플리트 장군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중인 태국 출신 학생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전쟁 전선이 교착된 1951년 가을 정부와 육군 수뇌부는 사관학교 재건을 추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밴 플리트 장군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밴 플리트 장군은 군사고문단장 메이요(Mayo) 준장에게?이 문제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고 메이요 준장은 미 육사에서 교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맥 킨니(McKinney) 대령을 선발하여 이 일을 맡겼다. 맥 킨니 대령이 받은 유일한 명령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 한국의 West Point를 설립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육사는 처음부터 4년제 대학 수준의 미 육사를 모델로 하였다. 당시에는 근대 육군의 전형 독일군을 비롯하여 유럽 어느 나라도 대학 수준의 공부를 사관학교에서 시키는 나라는 없었다.?

미 군사고문단에 의해 외적인 준비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육군본부에서는 인적자원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51년 10월 30일 안중근 의사의 생질로 광복군 출신의 안춘생 준장을 비롯한 216명의 창설요원에 의해 4년제 육군사관학교가 진해에서 창설되었다. 국군의 정통을 광복군에서 찾는다는 의지가 교장의 선임에 반영된 것이다. 안춘생 교장과 박중윤 교수부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미육사의 제도, 내규 등을 참조하고 교훈, 교가 등을 제정하여 참모총장에게 건의하였고, 이는 참모총장의 승인과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결정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훈 ‘智 仁 勇’의 휘호를 내렸다.

안춘생 교장은 전쟁 중에도 최윤식, 조순, 황찬호, 이기백 등 전국에서 최고의 교수진을 모았다. 육사는 당시 최고의 문리과(文理科) 대학이었다. 토목학교로 출발한 미육사의 영향을 받아 이과가 강하기는 하였지만 문과도 철학, 사학, 법학, 정치학, 경제학 등이 고루 편성되어 있었다. 미육사의 Thayer system을 비롯한 최선진의 교육방법이 도입되었다. 육사가 ‘서울의 동북’ 화랑대로 이전한 후 많은 교육자들이 육사를 돌아보고 놀랐다. 서울고등학교의 김원규 교장은 “대한민국에서 대학다운 대학은 육사 하나다”라고 극찬하며 많은 졸업생들을 육사로 보냈다.

서울고 출신으로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 16기로 입교하였는데, ‘의분(義憤)에 불탄’ 교관들은 이강석이 수학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문제를 일부러 어렵게 내서 이강석을 퇴교시키는 치기도 저질렀다. 박정희 대통령 아들 박지만은 공부를 그런대로 잘해서 그런 봉변은 없었다.

1952년에 입교한 1기생은 1955년에 임관하였다. 이 전쟁기간에 육군장교는 종합학교와 보병학교에서 배출하였다. 백마고지, 저격능선 전투를 비롯, 수많은 고지쟁탈전에서 희생된 ‘소모품 소위’들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들이 사실 6.25를 치러낸 육군의 근간이었다. 군사영어학교에 뒤이어 1946년 창설된 육사와 1951년 재개교한 육사의 맥락은 1960년대에 종합되었다. 육사 1기생은 11기생이 되었다.

밴 플리트는 이렇게 모든 정성을 바쳐 육성한 육사 11기가 군의 생명인 지휘계통을 유린하고 온 나라를 뒤죽박죽으로 만든 12·12를 일으키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12·12는 국가와 군의 비극이지만, 육사로서도 씻지 못할 오명을 역사에 남긴 것이다.

밴 플리트 장군의 동상은 화랑대의 정중앙에 위치하여 오늘도 생도들을 굽어보고 있다. 그는 ‘한국군의 아버지’이며 ‘육사의 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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