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이상설④] 고종 헤이그밀사 파견 칙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밀사에 대한 고종 임금의 신임장

[아시아엔=이상구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1906년 4월 마침내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자 나라의 운명에 초연할 수 없었던 그는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렸다. 고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 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후 국권을 찾지 못하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살던 집을 포함하여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삼아, 항일투쟁과 인재 양성을 위해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인천항에서 중국인의 상선에 올라 상하이로 갔고, 그 곳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8월 북간도 용정(龍井)촌에 도착했다.

당시 용정을 비롯한 북간도는 일제의 감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용정촌은 당시 일제의 탄압과 가난을 피한 조선인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을사늑약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시작한 동포들의 교육을 위하여 북간도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면서 교육구국운동에 전념한다. 이상설이 사비로 구입한 학교 건물은 용정의 기독교 인사인 최병익의 집으로 건물 면적은 231m² 정도의 규모에 학생 22명으로 출발하였다.

초대 숙장은 이상설이, 운영은 이동녕·정순만 등이 맡아보았으며, 교사는 이상설·여조현·김우용·황달영 등이었다. 교사의 월급·교재비·학생의 학용품 등 일체의 경비는 이상설이 사재로 부담하는 완전 무상교육이었고,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설립 초기에는 고등반인 갑반과 초등반인 을반으로 나누었으며, 그 뒤에는 세반이 되어, 갑반에 20명, 을반에 20명, 병반에 34명으로 분반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평가받는 교사였던 이상설은 자신이 세운 민족교육 요람의 갑·을·병 세 학급 가운데 상급반인 갑반에서 자신이 쓴 산술신서 상 (1, 2권)을 가르쳤다.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 김우용은 산수를 가르쳤다. 또 여준은 한문, 정치학, 법학 등을 지도했다. 이상설은 근대사의 첫 수학교과서 저자와 수학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용정촌에는 현재 이상설의 기념 정자를 세워 ‘이상설 정자(李相卨亭)’란 현판이 붙어있다. 그러나 1906년 간도행이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이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일제의 침략야욕에 마주 선 고종은 교육구국운동에 전념하던 이 교육자를 그대로 두지 못하고 1907년 다음과 같은 소임의 ‘임명장’을 보냈다.

“대 황제는 칙(刺: 황제의 명령을 적은 문서)하여 가로되 아국의 자주독립은 이에 천하열방(天下列郭 :세계여러나라)의 공인하는 바라…. 이에 여기 종이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 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 나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우리의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이번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이상설은 1907년 4월 고종의 칙서를 가지고 용정으로 온 이준을 만나, 같이 시베리아를 거쳐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1907년 7월 헤이그에 도착한다. 헤이그에서 이상설은 특사의 대표로 “고종이 서명하지 않은 서류에 근거한 을사늑약은 무효이며, 국제법에 어긋나게 일제가 1905년 강제로 조선의 외교권을 피탈하고, 자주권을 강탈한 후,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하니, 이를 공동으로 저지하자”는 주장을 편다. 그러자 곧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이상설에게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도하고 체포령을 내린다.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이어서 1907년 7월 18일 고종을 폐위시킨다. 이에 이상설은 귀국을 미루고 북간도와 러시아의 국경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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