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이상설③] 1895년 성균관장 부임, 수학·과학 필수과목 지정

100년 전 성균관 모습. 이상설이 관장할 때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시아엔=이상구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1894년 이상설은 25세의 나이로 치른 조선의 마지막 과거의 대과(大科, 문과 고종 31년 갑오(甲午) 전시(殿試) 병과(丙科) 2위)에서 급제하여 한림학사에 제수된 후 이어 세자시독관이 되었다. 이 과거에는 1882년 <수학정경절요괄집>(數學正徑節要括集)를 저술한 36세의 안종화(安鍾和, 1860-1924)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하고 귀국한 홍종우도 같이 합격하였다.

이승만과 김구가 같이 시험을 치루고 낙방한 조선의 마지막 대과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과거에 합격한 이상설에게 탁지부 재무관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이상설은 관계에 나가지 않고 혼란한 시국을 우려 속에서 관망하며 한동안 더욱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후 이상설은 성균관 교수, 성균관 관장(1895)을 맡았다. 이어 한성사범학교 교관·궁내부 특진관·학부협판·법부협판 등을 거쳤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침략 야욕이 노골화 되자 이에 대항하며 1904년 항일구국운동을 위한 대한협동회가 조직되고, 이상설은 회장으로 추대된다.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대동한 이준은 당시 부회장을 맡았고, 평의장에 이상재(李商在), 서무부장은 이동휘(李東輝), 편집부장은 이승만이 맡았다.

1895년 성균관장으로 부임한 이상설은 우리나라 최초로 성균관 경학과 교과과정에 수학과 과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였다. 이것은 수학교육이 전문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다루어지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상설은 성균관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를 실시하고, 학기제와 주당 강의시간수를 책정하는 등 제도상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시대 최고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은 근대대학으로 전환을 이루게 된다. <수리>를 저술한 이상설은 대한제국 학부(學部) 편집국장 이규환(李圭桓)의 요청으로 저자가 명시된 학부의 첫번째 수학교과서 편찬 시에 수학교과서 저술 의뢰를 받았다. 요청을 받은 이상설이 자신의 책 서문에 밝혔듯이 일본 수학자 우에노 기요시(上野淸)가 서양 수학책을 참고하여 일본어로 편집하고 교열한 <근세산술> 상권, 중권을 중심으로 하여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고 조선의 상황에 맞게 대부분의 문제를 바꾸고 고치고, 필요한 설명을 붙여 1900년 7월 20일 발간한 책이 교과서 중등수학 <산술신서> 상 1권, 2권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저자가 명시된 최초의 근대수학 교과서이며 동시에 한성사범학교에서 예비교사 교육용으로 쓰였듯이 순환소수, 순열 등을 포함하는 책으로 이후 나오는 많은 초등학교 입문 수준의 책과 차별화된 조선어 수학책으로 볼 수 있다. 이상설은 수학 교과과정을 만들고, 강의록을 만들었으며, 그 수학을 가르칠 교사를 위한 수학교과서를 만들고, 또 실제 가르치면서 한국근대사의 첫 수학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야욕을 드러내자 이상설은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완강히 저항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05년 학부협판(學部協辦)과 법부협판을 역임했으며, 11월 초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었다. 1905년 11월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 등 을사5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그는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참찬이었지만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 조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순사직(殉社稷) 상소를 올려 고종은 사직(社稷)을 위해 죽을 결심으로 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나 올렸다.

한편, 조약체결 직후 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 원로대신들을 소수(疏首)로 백관의 반대 상소와 복합항쟁(伏閤抗爭)을 벌이도록 주선하였다. 이상설은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에 의해 생명은 연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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