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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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나무의 아이’ 박노해

    한 마을의 역사와 품격은 아름드리 숲이다 크나큰 고난을 뚫고 온 장엄한 세월의 나무 그 나무와 함께 사람은 깊어진다 그 나무에 기대어 아이들은 자란다 나는 나무의 아이, 나무는 나의 성전 내 등 뒤에서 또 다른 아이들이 걸어오고 나무들은 무언가 비밀스런 삶의 이야기를 바람의 속삭임으로 전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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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가을에는 더’ 박노해

    어느 날부터 내게 고요함이 사라졌다 어느 날부터 내게 그리움이 사라졌다 어느 날부터 내게 긴 여운이 사라졌다 가을에는 더 그리워져야겠다 고독해져야겠다 간절해져야겠다 이 가을에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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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바람이 불어오면’ 박노해

    에티오피아 고원에 바람이 불어오면 아이들은 어디로든, 어디로든 달려 나간다 초원을 달리고 흙길을 달리고 밀밭을 달린다 허기를 채우려는지 온기를 찾는 것인지 소년은 소녀를 만나고 친구는 친구를 부른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내 영혼은 달려 나간다 어디로든, 어디로든, 그리운 네가 있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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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길’ 박노해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 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잃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걸어라 너만의 길로 걸어가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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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신발 깔창’ 박노해

    신발 끈을 묶고 정원 일을 나서는데 어라, 새로 산 신발 깔창이 반항한다 깔창을 꺼내 보니 날 빤히 바라보며 밟히기 싫다구, 나 밟히기 싫다구요 그래, 안다 나도 평생을 짓밟히며 살아왔다 그래도 난 매일 널 꺼내서 씻어주고 말려주며 감사하지 않니 누군들 밟히고 또 밟히고 소리 없이 헌신하는 걸 좋아하겠냐만 그게 우리 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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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이런 날, 할머니 말씀’ 박노해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있어도 별일 아닌 걸 가지고 무슨 대단한 사태인 양 호들갑을 떨고 악소문을 퍼뜨리고 불안과 불신과 공포의 공기를 전하며 동네와 장터를 흉흉하게 만드는 근본 없는 자들을 향해서 할머니가 하는 말 염병하네, 엠병하네, 엠병하네 저이가 염병을 퍼뜨리고 있다는 저이가 전염병과 다름 없다는 할머니의 단호한 일갈 염병하네, 엠병하네, 엠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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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홍수가 쓸고 간 학교’ 박노해

    마을에 큰 홍수가 있었다 아직 다 복구하지 못한 학교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모여 수업을 한다 무슨 사연일까, 자꾸만 문밖을 바라보는 소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고 만 걸까 오지 못한 짝꿍을 떠올리는 걸까 죽은 자들이 그립고 아파와도 소녀는 눈물을 삼키며 앞을 바라본다 그저 고개 들어 앞을 바라보는 것이 필사적인 투쟁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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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한계선’ 박노해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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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자화상 그리기’ 박노해 “고난도 비난도 치욕도 다 받아 사르며 가라고”

    광야의 봉쇄수도원 수녀님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의 모습이라며 몽당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 보냈는데 이게 나야, 웬 이쁜 외계인, 혼자 웃다가 번쩍 다시 보니 귀가 이렇게 유난히 큰 것은 말 잘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너무 작아 미약한 말에도 나직이 귀 기울이라고 눈이 이렇게 푸른 것은 하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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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뒤를 돌아보면서’ 박노해

    나이가 드니 안녕이 참 많군요 안녕이란 말이 참 무서워지는군요 가면 갈수록 사랑이 오기보다 이별이 더 많이 걸어오는군요 나이가 드니 뒤를 돌아보는 일이 많군요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생각할 때도 뒤를 돌아보면서 앞을 바라보는군요 그대와 나, 우리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뒤돌아봐요 많은 강을 건너고 많은 산을 넘었어요 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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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날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박노해

    아침이면 목 마른 꽃들에게 물을 준다 저녁이면 속 타는 나무에게 물을 준다 너희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구나 서로를 경계하지도 멀어지지도 않았구나 벌들은 꽃과 꽃을 입맞춰주고 바람은 서로 몸을 기울여 손잡아주고 무더위에도 속 깊은 만남으로 살고 살게 하고 살아가는구나 복숭아는 대지의 단물을 빨아올리고 체리 자두 블루베리는 달콤하게 익어가고 벼 포기는 자라고 감자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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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나랑 함께 놀래?’ 박노해

    어린 날 나에게 가장 무서운 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아니었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거였네 세 살 많은 영기가 우리 반에 편입한 뒤 동무들을 몰고 다니며 부하로 따르지 않는 나 하고는 누구도 함께 놀지 못하게 한 그 지옥에서 보낸 일 년이었네 동백꽃 핀 등굣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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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꽃이 온다’ 박노해

    날이 가물어 땅이 마른다 나도 마른다 코로나 검은 손에 만남도 가물어지고 살림도 말라간다 한줄기 단비가 오시고 서늘한 밤비가 내리자 6월의 귀인이 걸어온다 꽃이 온다 꽃이 와 수국 수국 꽃이 온다 백합 백합 꽃이 온다 접시 접시 꽃이 온다 수심 어린 얼굴마다 마스크를 뚫고서도 꽃이 와라 꽃이 와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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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진보한 세대 앞에 머리를 숙여라’ 박노해

    여린 새싹 앞에서 허리를 숙인다 눈부신 신록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진보한 젊은이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내 가난한 젊은 날은 이렇게 살았다고 총칼 앞에 온몸을 던져 불처럼 살았다고 곧은 목으로 그들을 가로막지 마라 그들은 이미 충분히 고통받고 있다 풍요는 총칼보다 더 영혼을 상하게 하고 자유는 감옥보다 더 젊음을 구속하고 있으니 이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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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첫마음을 가졌는가’ 박노해

    첫인상을 남길 기회는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첫사랑의 떨림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첫마음을 새길 시기는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좌우되지 않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무력한 일상 속에서도 나 살아있게 하는 그 첫마음을 가졌는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때나 화려한 빛에 휘청거릴 때나 눈물과 실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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