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중 23회(1970~1972년)…송파, 서울, 대한민국, 그리고 세계
송파구 가락동에서 출발하는 역사기행-진흙밭에서 롯데월드타워까지
논밭 사이로 불어온 변화의 바람
1970년 서울 가락동의 아침은 지금과 달랐다. 오늘날 아파트와 상가, 복잡한 도로가 들어선 이곳은 당시만 해도 논밭과 마을길이 어우러진 한적한 농촌이었다. 새벽이면 농부들이 일터로 나서고, 계절에 따라 농사일이 달라졌다. 사람들의 생활은 자동차보다 땅과 날씨에 더 가까웠다.
가락동은 1963년 서울로 편입됐지만, 1970년대 초에도 도시의 중심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송파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가락동은 서울 성동구 송파출장소 관할이었으며, 이후 1975년 강남구, 1979년 강동구를 거쳐 1988년에야 송파구에 속하게 됐다.
‘가락’이라는 이름에는 오래된 마을의 역사가 담겨 있다. 옛 이름은 가락골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송파 일대 주민들이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시절 가락동 주민들은 훗날 이곳에 국내 최대 규모의 농수산물 도매시장이 들어서고, 지하철이 지나며, 수만 명이 거주하는 고층 주거지가 형성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락시장이 개장한 것은 1985년의 일이다. 그러나 마을 주변에서는 이미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강의 물길을 바꾸고, 잠실을 육지로 만들다
1970년대 초 송파 일대를 바꾼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잠실 개발이었다. 잠실은 원래 한강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된 섬과 저지대의 공간이었다. 서울은 급증하는 인구와 주택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한강 남쪽의 땅을 새로운 도시 공간으로 바꾸려 했다.
1971년 본격화된 잠실 공유수면 매립사업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었다. 물길을 정비하고 땅을 메우며 새로운 도로와 주거지를 조성하는 대규모 도시개조 사업이었다.
오늘날 시민들이 산책하는 석촌호수 역시 한강과 연결됐던 옛 물길의 흔적이다. 호수의 주변 풍경이 도시공원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70년 10월 착공한 잠실대교는 1972년 7월 1일 준공·개통됐다. 길이 1280m, 너비 25m의 6차선 다리였다. 서울기록원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양택식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당시 준공식 사진이 남아 있다.
다리는 단순히 강 양쪽을 연결하는 시설이 아니었다. 서울 도심과 강남의 동쪽 지역을 잇고, 주변의 농촌과 저지대를 새로운 도시생활권으로 편입하는 상징이었다.
잠실대교가 놓이자 강을 건너는 방식뿐 아니라 사람과 물자의 흐름도 달라졌다. 오랫동안 한강을 건너던 나룻배의 역할은 줄어들었고, 도로와 자동차가 새로운 교통의 중심이 됐다.
그 변화를 상징하는 장면이 있다. 잠실대교 개통 무렵, 신천 나루의 마지막 뱃사공이 살림살이를 배에 싣고 떠나는 모습이 1972년 7월 1일 신문에 실렸다. 다리의 개통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길의 시작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이어온 생업과 생활방식의 끝이었다.
가락동도 그 변화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 당장 논밭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땅의 가치와 이동의 방향, 앞으로의 도시계획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울은 하늘로 솟고 땅속으로 뻗었다
1970~1972년 서울의 변화는 가락동과 잠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울은 산업화와 인구 집중 속에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도심에는 고층 건물이 늘어났고, 외곽의 농촌과 산비탈에는 주택이 들어섰다. 도시의 규모는 확장됐지만, 그 속도를 뒷받침할 안전과 기반시설은 충분하지 않았다.
1970년 4월 8일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부실한 설계와 시공, 무리한 건설 정책의 문제를 드러낸 참사였다. 속도와 실적을 앞세운 도시개발이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1971년 4월 12일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착공됐다. 도로와 버스에 의존하던 서울이 본격적인 도시철도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공사는 훗날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수도권 철도망의 출발점이 됐다.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서울 중구의 대연각호텔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고층 건물의 화려한 외관과 달리 피난·방재체계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비극이었다.
서울은 위로는 고층화되고 아래로는 지하철을 건설했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전과 삶의 질을 보장하는 일은 또 다른 과제로 남아 있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는 1970~1974년 양택식 시장 재임기를 서울이 광역도시의 틀을 갖추어 가던 시기로 설명한다. 상하수도와 도시가스, 생활 기반시설이 확대되던 때이기도 했다.
새로운 다리와 도로, 지하철은 도시의 밝은 미래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철거민과 도시 빈민,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이 있었다.
1971년 8월 10일 서울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살던 경기도 광주대단지에서 대규모 항의가 일어났다. 오늘날 성남시의 역사와 연결되는 이 사건은 도시개발의 부담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를 묻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서울의 성장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얼굴이 있었다.

고속도로는 열리고, 노동자는 거리에서 외쳤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전 구간 개통됐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 됐다.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는 시간이 단축됐고, 공장과 시장을 연결하는 새로운 경제의 동맥이 형성됐다.
같은 해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에서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조건 개선을 외치며 분신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전태일의 죽음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1970년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상징이었다.
한쪽에서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됐고, 다른 한쪽에서는 성장의 현장을 지탱하던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경제성장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1971년에는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4월 27일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 김대중 후보와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3선에 성공했다. 정치적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8월 23일에는 실미도 부대원들의 탈출 사건이 발생했고, 국가 안보체제의 어두운 단면이 드러났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남북관계에서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7월 4일 남북한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분단 이후 남북 당국이 공식적으로 합의한 최초의 공동문서였다. 대결을 넘어 대화의 가능성이 열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불과 석 달여 뒤인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었다. 이어 유신헌법이 확정되면서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수립됐다.
1972년은 그렇게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와 민주주의의 후퇴가 교차한 해였다.
바다 건너 세계도 격변하고 있었다
가락동의 농부들이 밭을 갈고, 서울에서 지하철 공사가 진행되고,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정치적 격변을 겪는 동안 세계 질서도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1970년 4월 미국의 아폴로 13호는 달을 향해 발사됐지만 우주선의 산소탱크가 폭발하면서 달 착륙을 포기해야 했다. 승무원 세 명은 지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1971년에는 남아시아에서 전쟁과 독립의 역사가 펼쳐졌다. 동파키스탄의 독립운동은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이어졌고, 12월 방글라데시가 독립을 쟁취했다. 하나의 국가 안에 있던 지역이 언어와 문화, 정치적 갈등을 거쳐 새로운 나라로 탄생했다.

1972년 2월에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과 중국이 오랫동안 이어온 적대관계를 완화하기 시작한 역사적인 방문이었다.
냉전의 질서가 달라지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I)이 합의됐고, 한반도에서도 국제적 긴장 완화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남북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한편에서는 베트남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1972년에는 북베트남군의 대규모 공세와 미군의 폭격이 이어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같은 해 9월 서독 뮌헨올림픽에서는 이스라엘 선수단을 겨냥한 테러가 발생했다.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올림픽마저 국제정치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70~1972년의 세계는 우주를 향한 도전과 독립국가의 탄생, 강대국의 화해와 전쟁의 참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다시 가락동으로 돌아오다
반세기 넘는 시간이 흘렀다. 1970년대 초 가락동의 논밭과 마을길이 있던 자리는 이제 아파트와 상가, 도로와 지하철이 지나는 도시가 됐다. 잠실대교는 일상적인 교통시설이 됐고, 석촌호수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 공간이 됐다.
그러나 도시가 바뀌었다고 과거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가락동을 걷는 사람들의 발밑에는 농사를 짓던 사람들의 시간이 남아 있고, 잠실대교를 건너는 자동차의 행렬 뒤에는 마지막 나룻배를 타고 떠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전태일의 죽음, 1971년 대통령선거와 광주대단지 사건, 1972년 남북공동성명과 10월 유신은 서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경험한 대한민국의 서로 다른 모습이었다.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미·중 관계의 변화와 베트남전쟁, 방글라데시 독립은 한국의 정치·경제·외교 환경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가락동의 주민들이 그 모든 사건을 실시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멀리서 일어난 변화는 시간이 흐르며 작은 마을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유명한 사건의 날짜를 외우는 일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네의 변화가 서울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됐고, 대한민국과 세계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1970~1972년, 가락동은 여전히 농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을 둘러싼 서울과 대한민국, 세계는 이미 새로운 시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70~1972년 가락동·서울·대한민국·세계의 주요 사건 40선
① 가락동과 오늘날 송파 지역 — 10개 변화와 역사적 배경
| 연도 | 사건과 변화 |
|---|---|
| 1963 | 가락동과 송파 일대 서울 성동구 편입—1970년 당시 행정구역의 배경 |
| 1970 | 가락동은 농업과 농촌마을 중심의 생활환경 유지 |
| 1970.10 | 잠실대교 착공 |
| 1971 | 잠실 공유수면 매립과 한강 물길 정비 진행 |
| 1971 | 잠실 일대 제방·매립공사 확대 |
| 1971 | 잠실대교 교각과 상부구조 공사 진행 |
| 1972.07.01 | 잠실대교 준공·개통 |
| 1972 | 나루터의 교통 기능 변화와 주변 도로 연결 확대 |
| 1972 | 잠실 일대 도시개발의 기반 형성 |
| 이후 | 1975년 강남구 편입, 1985년 가락시장 개장, 1988년 송파구 신설 |
② 서울 주요 사건 — 10건
| 날짜 | 사건 |
|---|---|
| 1970.03.17 | 정인숙 피살사건 |
| 1970.04.08 | 와우아파트 붕괴 |
| 1970.11.13 | 전태일 분신 |
| 1971.04.12 | 서울 지하철 1호선 착공 |
| 1971.04.27 | 제7대 대통령선거 실시 |
| 1971.08.10 | 광주대단지 사건—서울 철거민 이주정책과 연결 |
| 1971.08.23 | 실미도 부대원 탈출사건, 서울에서 최후 충돌 |
| 1971.12.25 | 대연각호텔 대형 화재 |
| 1972.07.01 | 잠실대교 개통 |
| 1972.12.02 | 서울시민회관 화재 |
③ 대한민국 주요 사건 — 10건
| 날짜 | 사건 |
|---|---|
| 1970.04 | 새마을운동 제창 |
| 1970.07.07 |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 |
| 1970.11.13 | 전태일 분신과 노동문제 부각 |
| 1971.04.27 | 박정희·김대중 대통령선거 |
| 1971.05.25 | 제8대 국회의원 총선거 |
| 1971.08.23 | 실미도 사건 |
| 1972.07.04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
| 1972.08 |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개최 |
| 1972.10.17 | 10월 유신 선포 |
| 1972.12.27 | 유신헌법 공포·시행, 제4공화국 출범 |
④ 세계 주요 사건 — 10건
| 날짜 | 사건 |
|---|---|
| 1970.04 | 아폴로 13호 우주비행 및 승무원 귀환 |
| 1970.04.22 | 제1회 지구의 날 |
| 1970.09 | 요르단의 ‘검은 9월’ 충돌 |
| 1971.03 | 동파키스탄 독립전쟁 시작 |
| 1971.10.25 | 유엔총회, 중국 대표권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부여 |
| 1971.12 | 방글라데시 독립 |
| 1972.02 | 닉슨 미국 대통령 중국 방문 |
| 1972.05 | 미국·소련 SALT I 합의 |
| 1972.09.05 | 뮌헨올림픽 테러 |
| 1972.12 | 미국의 북베트남 대규모 공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