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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의 사람읽기] 이재돈, 군복 벗고 중국 역사 속으로…장군에서 학자로 살아온 30년

2025년 11월 육사탑에서 이재돈 장군

1993년 군 인사비리 수사로 전역…대사직 제안 거절하고 중국 유학, 30년 연구 끝에 역사인물 100인 집대성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군에는 거센 인사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하나회 숙청에 이어 군 고위층의 인사비리에 대한 수사가 진행됐다. 해병대 1사단장이던 이재돈 소장도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당시 나는 국방부 출입기자로서 군 개혁 과정을 취재했다. 그때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이런 표현이 떠오른다.

“정작 앓던 이는 놔두고 생니를 뽑았다.”

개혁의 명분과 개별 인사에 대한 조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군 내부의 오랜 관행을 바로잡는 일은 필요했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어떤 책임을 졌으며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1993년 4월 28일 이재돈 소장은 군 인사비리와 관련한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됐다. 소장 진급 과정에서 금품을 건넸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가 있다. 이재돈의 삶을 이해하려면 군 생활의 마지막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해병대 장군이었다. 두 차례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했으며, 1993년 군복을 벗었다. 그런데 그 뒤의 삶이 더욱 눈길을 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경남고 동문인 그의 제대 후 대사직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의 자리를 마다하고 택한 길은 중국 연구였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부인과 함께 중국 청화대 유학길에 올랐다.

군복을 벗은 뒤 새로운 권력이나 지위를 좇는 대신 평생 공부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밀양에서 태어나 해병대 장군이 되기까지

이재돈은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18기로 1964년 임관해 해병대 장교의 길을 걸었다. 그는 베트남전에 두 차례 참전했다. 베트남전은 한국군이 외국에서 대규모 전투를 경험한 전쟁이었다. 젊은 장교에게 낯선 땅의 전투는 군사작전과 지휘, 생사의 문제를 동시에 마주하는 현장이었을 것이다.

이재돈은 이후 다양한 지휘관 보직을 거쳤다. 1988년 장군으로 진급했고, 포항 해병대 1사단장에 올랐다. 해병대 1사단은 한국 해병대의 핵심 전투부대다. 사단장에게는 전투태세뿐 아니라 수많은 장병의 안전과 군 기강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의무가 따른다.

이재돈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군복은 직업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그런 그가 1993년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군 생활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1979년 부산 계엄, 불상사 없이 부대를 지휘하다

나는 이재돈의 군 생활 가운데 특히 1979년과 1980년 부산에서의 경험에 주목한다. 1979년 10월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은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에게 확산됐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20일에는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이재돈은 당시 해병대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계엄 상황에서 군 지휘관의 판단은 평상시와 다르다. 부대에 부여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동시에 민간인과 군인 사이에서 예기치 않은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나는 그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다. 확인한 내용은 분명했다. 그가 지휘하던 해병대 대대에서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 대목은 그의 군 생활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기록이다. 계엄이라는 비상상황에서 군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복종만이 아니다. 군 지휘관은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부하와 민간인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재돈은 그 어려운 시기를 부산에서 대학교에 부대를 이끌고 파견돼 근무했다. 나는 그가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경계했는지, 어떤 원칙으로 장병들을 지휘했는지 더 들을 예정이다. 그의 구술은 개인의 회고를 넘어 부마민주항쟁 당시 군 내부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93년 문민정부의 군 개혁, 그리고 해병대 1사단장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했다. 32년 만의 문민정부 출범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고 군 내부의 오래된 인맥과 비리 구조를 개혁하는 데 착수했다. 가장 상징적인 조치가 하나회 핵심 인사들에 대한 인사 개편이었다. 이어 군 인사비리 수사가 확대됐다.

4월 27일에는 김종호 전 해군참모총장과 조기엽 전 해병대사령관 등이 구속됐고, 다음 날 이재돈 해병대 1사단장도 구속됐다. 당시 군검찰은 진급 과정에서 금품이 전달됐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군 장성들의 인사 문제를 둘러싼 수사는 언론과 국민의 큰 관심을 끌었다.

나는 그 시기, 그 사건을 취재했다. 김영삼 정부의 군 개혁을 바라보며 느꼈던 문제의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작 봐야 할 구조적 문제는 얼마나 해결됐는가. 개혁 과정에서 개별 군인에게 적용된 기준은 공정했는가.

이재돈의 사건을 이해하려면 당시 군 인사 관행, 수사 과정, 이후 법적 처리를 함께 살펴야 한다. 나는 그 과정을 확인해 한 사람의 군 생활이 끝난 사정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기록할 것이다. 그때 그는 50대 초반이었다.

20대에 임관해 거의 30년 동안 몸담았던 군을 떠나야 했다. 젊은 시절을 바친 조직과 결별한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군인의 삶에서 진급과 보직은 중요하다. 그러나 군복을 벗은 뒤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그 사람을 보여준다. 이재돈은 이후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중국 유학 후 낸 첫 저작. <지앙수아이> 표지.

대사직 제안을 거절하고 선택한 길

전역 후 이재돈에게 대사직 제안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인생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장군 출신 인사가 외교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일은 드물지 않다. 외교와 안보 분야의 경험을 살려 대사로 활동하는 길도 있다. 그러나 이재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거절했을까. 군 생활을 끝낸 뒤 공직에 다시 나서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일까.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결정을 섣불리 해석할 사안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실제로 선택한 길이 분명했으며, 현명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대사라는 직함보다 연구자의 삶을 선택한 이후 그는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역사와 정치, 사상과 인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오랜 군 생활을 마친 사람이 다시 학생이 된 것이다.

그에게 중국 연구는 단순히 새로운 직업을 찾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깊숙이 관여하는 국가다. 군사와 안보를 오래 다뤄온 사람에게 중국을 이해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에 관심을 갖는 것과 수십 년간 중국을 연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재돈은 그 어려운 길을 택했다.

50대에 다시 학생이 되다

군에서 지휘관의 하루는 명령과 보고, 결심과 책임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의 하루는 질문과 공부, 과제와 시험으로 채워진다. 이재돈은 전역 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공부했다.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문학과 문화를 배웠으며 중국 유학도 경험했다.

50대에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한자의 뜻을 아는 것과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은 다르다. 성조와 발음부터 익혀야 하고 새로운 표현을 반복해 연습해야 한다.

더구나 중국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성격이 크게 다르다. 중국을 이해하려면 언어뿐 아니라 역사와 철학, 제도와 사회에 대한 폭넓은 공부가 필요하다. 그는 그 과정을 차근차근 밟았다.

2002년에는 대륙전략연구소를 설립했다.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기 위한 기반이었다. 연구소를 만든 뒤에도 공부는 계속됐다. 중국의 역사적 인물과 정치체제, 군사전략과 대외관계 등을 살펴보며 자료를 축적했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계급장이 아니었다. 어떤 자료를 읽었고, 무엇을 새로 알게 됐으며,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해졌다. 한 분야에서 정상에 가까운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일. 이재돈의 두 번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부인 장옥규와 함께 걸어온 공부의 길

이재돈의 중국 연구를 이야기하면서 부인 장옥규를 빼놓을 수 없다. 장옥규는 남편의 공부를 곁에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함께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연구와 저술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남편이 집필한 원고를 입력하고 검토하는 과정에 힘을 보탰다. 연구와 저술에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일이 많다.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문장을 다듬으며 여러 차례 원고를 대조해야 한다.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반복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다섯 권에 이르는 역사서를 만드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재돈과 장옥규는 그 시간을 함께 보냈다. 부부가 같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일상을 공유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함께 배우며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남편과 그 곁을 지킨 아내가 나이 들어 같은 책상에 앉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모습. 그들에게 공부는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보내는 삶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노년에 이르러 또 다른 공동의 과제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재돈 저 <누가 중국을 움직이는가>

중국을 움직인 100명을 따라가다

2025년 이재돈은 《누가 중국을 움직이는가》 전 5권을 펴냈다. 부제는 ‘대륙을 뒤흔든 역사적 인물 100인’이다. 선진시대부터 한·수나라, 당·원나라, 명·청나라를 거쳐 민국시대와 현대까지 중국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다룬 책이다.

제1권은 664쪽, 제3권은 752쪽, 제5권은 729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다. 전 5권은 2025년 4월 24일 출간됐다.

그는 왜 중국의 역사적 인물 100명을 선택했을까. 중국을 이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왕조의 흥망을 따라갈 수도 있고, 전쟁과 외교의 역사를 살펴볼 수도 있다. 경제의 변화를 통해 중국의 발전을 분석할 수도 있다.

이재돈은 역사적 인물을 중심에 놓았다. 중국의 역사는 황제와 관료, 사상가와 군인, 혁명가와 정치지도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온 역사이기도 하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시대적 조건에서 움직였으며, 그 결정이 중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군에서 지휘관으로 살아온 이재돈에게 역사 속 지도자의 결정은 특별한 연구 대상이었을 것이다.

중국에 관한 그의 문제의식은 책의 소개 글에도 나타난다. 한국이 중국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정치·경제·사회·문화와 안보 분야에서 올바른 대응전략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이웃이다. 중국을 알아야 한국의 선택도 더욱 정확해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는 그 공부를 수십 년 동안 이어왔다.

이재돈 장군

군인의 경험과 역사 연구

이재돈의 군 경력과 중국 연구는 서로 무관한 두 개의 인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군 지휘관은 제한된 정보 속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상황을 분석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며 여러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역사 연구도 비슷한 질문에서 출발할 때가 있다. 왜 그 인물은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한 사람의 결심은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을까.

물론 군 지휘와 역사 연구의 방법은 다르다. 군사적 경험이 곧바로 역사 해석의 정확성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랜 지휘 경험이 그로 하여금 중국 역사 속 인물의 결단과 전략에 관심을 갖도록 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해병대 장군으로 살아온 이재돈은 중국의 역사에서 무엇을 읽어냈을까. 중국은 한국에 거대한 시장이자 중요한 외교 상대이며, 동시에 안보전략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국가다. 한미동맹과 남북관계, 동북아의 군사적 균형을 이해하는 데도 중국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재돈의 공부는 개인적인 지적 관심을 넘어 우리 사회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중국을 이해한다는 것은 중국 정부의 정책과 발표를 아는 데 그치는가. 아니면 수천 년에 걸친 역사와 그 속에서 형성된 사회, 문화, 사람들의 생각까지 들여다보는 것인가.

그가 펴낸 책은 이런 질문과 연결돼 있다.

1993년의 기억,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

나는 다시 1993년으로 돌아간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그해 군 인사 개혁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군의 정치 개입을 줄이고 문민통제의 기반을 강화하려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의 전체적인 역사적 의미와 그 과정에서 개별 군인이 겪은 일은 각각 살펴봐야 한다.

이재돈은 군 인사비리 수사의 대상이 됐고, 결국 군복을 벗었다. 그 사건이 그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군인으로서 이어가던 경력이 끝났고, 이후 중국 연구라는 다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진급을 부탁하는 금품이 아니라, 이미 진급이 결정된 후에, 하지 않아도 될 인사치례가 그의 군생활을 마치게 했다. 그러니 한편 그것은 그를 중국의 연구로 이끄는 운명의 선견부대였던 거다.

그러나 당시 사건의 실체를 판단하려면 더 많은 기록이 필요하다. 나는 당시 《한겨레》와 《신동아》 등에 실린 기사들을 다시 살펴본다. 내가 직접 취재하고 썼던 기록도 그 안에 있다. 그때 내가 품었던 문제의식은 단순히 어느 장군의 진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조치가 실제로 누구에게 어떻게 적용됐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공정했는지를 묻는 일이었다. 이재돈에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을 1993년의 사건 하나로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시련을 겪었는가뿐 아니라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이기도 하다.

그는 군복을 벗은 뒤에도 자신에게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을 공부하고, 연구소를 설립하고, 책을 썼다. 그 길을 장옥규 여사가 함께 걸었다.

2026년 2월 이재돈이 설립한 대륙전략연구소 정기총회에서. 왼쪽 다섯번째 이재돈 장군.

계급장을 내려놓은 뒤 남은 것

1941년에 태어난 이재돈은 2026년 현재 여든다섯 해째를 살아가고 있다. 1964년 해병대 장교로 임관한 뒤 약 30년 동안 군인으로 복무했고, 전역 후 다시 30년 넘게 중국 연구에 매달렸다.

그의 인생에는 두 개의 긴 시간이 있다. 앞의 30년은 군인의 시간이었다. 전쟁과 부대 지휘, 조직과 명령 속에서 살아왔다. 뒤의 30여 년은 공부하는 사람의 시간이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의 역사와 인물을 읽으며 자신의 연구를 책으로 남겼다.

나는 두 시간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그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서 1979년 부산의 계엄 상황은 중요한 기억이다. 1993년 군 개혁 과정에서 겪은 사건 역시 그렇다. 대사직 제안을 거절하고 중국 연구를 선택한 일도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것은 그가 이후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다. 해병대 장군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고 해서 그것이 한 인간의 마지막 직함이 될 필요는 없다. 장군이 학생이 될 수도 있고, 사단장이 연구자가 될 수도 있다.

어제까지 부하들에게 명령하던 사람이 오늘은 선생에게 질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자신의 공부를 다섯 권의 책으로 내놓을 수도 있다. 그것이 이재돈이 살아온 두 번째 인생이다.

나는 그에게 1993년의 일을 다시 묻고 싶다. 대사직 제안을 왜 거절했는지도 듣고 싶다. 부산에서 계엄 상황을 겪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중국을 공부하면서 무엇을 새롭게 깨달았는지도 궁금하다. 아울러 그가 사재를 아끼지 않고 쏟아 만든 대륙전략연구소에 바라는 일들도 묻고 싶다.

그 답을 듣기 전에는 그의 삶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기록만으로도 생각해볼 만한 것은 있다. 계급장은 군복을 벗는 날 함께 내려놓는다. 그러나 그 사람이 쌓은 경험과 지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이 새로운 공부로 이어질 때 한 사람의 인생은 또 다른 깊이를 얻는다.

이재돈은 그 길을 걸어왔다. 군복을 벗은 장군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걸어온 그 두 번째 길을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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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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