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준 칼럼] 노년기 고독과 상실에 대처하는 가와바타와 카뮈의 방식

우리나라는 작년말 만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으며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다. 이대로 가면 2070년에는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우울증, 노인 자살률 1위라는 ‘3관왕’ 현실 속에서 노인의 삶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 열린 대한명상의학회(회장 이강욱 강원대 정신과) 춘계학술대회에서 오늘날 노인의 삶은 이렇게 요약됐다.
친구와 배우자가 죽고
신체적 기능이 떨어지고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고
시간이 갈수록 죽음은 더 가까워지고
삶의 의미는 계속 흔들린다.
끊임없이 허무,소멸 같은 본질적 문제를 직면∙애도∙적응해야 한다.
정신과를 찾는 노인들 대부분은 수면장애, 인지기능 저하, 정서조절장애를 동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울증·불안장애·경도인지장애·치매 등으로 고통받거나 발병 위험이 크다.
노인의 일상은 말 그대로 ‘상실의 연속’이다. 과거 잘 살았건 못살았건 인생에서 겪은 무수한 흔적과 상처는 상실의 덩어리들이다. 게다가 지금은 하루하루 쇠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의사들은 이 상실감을 덜기 위해 약물, 인지행동치료, 명상, 상담 등을 복합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삶의 의미를 찾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라 말한다.
문학이 알려주는 두 가지 대처법
원주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김태희 교수는 노인들의 삶을 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문학과 인생을 통해 비교 설명했다.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프랑스의 알베르 카뮈.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상실을 겪었다. 가와바타는 열 살 이전에 부모, 조부모, 형제 등 온 가족을 잃었다. 카뮈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청각장애 어머니와 냉정한 할머니 아래서 자랐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가와바타는 상실 앞에서 저항하기보다 ‘어쩔 수 없음’을 체득하고, 자연의 침묵과 아름다움 속에서 감정을 승화시켰다.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처럼 아름답게 말이다.
반면 카뮈는 삶을 ‘부조리’라 보며 실존적으로 마주했다.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상실은 ‘필연적인 것’이며, 그래서 인간은 이를 직시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가야 된다.
김 교수는 노인 환자들을 ‘가와바타형’과 ‘카뮈형’으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한다. 한쪽은 상실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능동적으로 저항하며 감정을 드러낸다.
어떤 방식이 더 옳다고 단정할 수 없다. 사람마다 살아온 인생, 성격, 정서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대응의 방식이 필요하다. 때론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것이 해답일 수 있고, 때론 분노와 좌절을 함께 토해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삶의 마지막을 향해 걷는 길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노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내 삶의 문제, 부조리, 지금 내 마음의 상실과 고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 회색 대기실에 들어설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상실은 삶의 불청객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앞에서 어떤 자세로 서느냐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다가온다. 그 해답은 누군가의 삶 속에, 또 문학 속에 이미 다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