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 칼럼] 정호용·오자복·이상훈 세 국방장관을 보좌관으로 모셔보니···.

육사 생도대장 재직 중인 1987년 12월말경 정호용 국방장관(위 사진 오른쪽) 보좌관으로 갑자기 내정되어 이임식도 못하고 부임해서 근무하다가, 잠시 시간을 내서 육사에서 이임식을 하고 국방부 근무를 시작했다.
육사 선배인 전임 장관보좌관으로부터 장관 모시는데 유념해야 할 중요 인계사항 5가지를 설명 듣고 메모까지 받았다. 그 중에 최우선순위 유념사항이 퇴근 시간 전 약 30분 가량은 장관께서 개인기록 정리를 하는데 전화와 결재를 모두 차단하고 개인 시간을 드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물론 며칠 정도는 준수했지만 그러다 보니 내 판단에, 육해공군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결재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예산집행을 급히 해야 하는 자료와 하루가 지나면 심대한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결재도 있었다. 나는 안 되겠다는 판단 하에 며칠 지난 후 결재를 위해서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니 당연히 업무 리듬이 깨지게 되었고 순간 무슨 일이냐는 질문과 함께 돋보기안경 넘어 시선과 마주쳤다. 내가 “예, 결재사항입니다”라고 하니,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하는 중요한 결재인가?” 하는 답이 돌아왔다. 순간, 느낌에 약간 짜증이 섞인 음성 같았다. 한참 몰두해서 정리하는데 리듬이 깨지니 당연하다고 보았다.
나는 즉시 “예, 지금 이 시간에 하셔야 할 중요한 결재로 저는 판단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정리하던 자료를 옆으로 밀치면서, “이리 가져와봐!” 하신다. 순간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결재판을 펴서 앞에 놓았다, 나는 순간 엄청난 긴장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급할 정도로 중요한 결재 사항은 아닌데…’라는 내용의 말이 나온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비참한 입장에 서게 되었기에 긴장을 했다.
그러던 중에 내용을 다 보시고 난 후, “흠…” 하고 결재하면서 아무 말씀 없이 결재판을 접어서 내게 주셨다. 그 후부터 기본적으로 룰은 지켰지만 중요한 결재는 내 판단에 의해 계속했으며 장관께서는 항상 아무런 말씀 없이 흔쾌히 결재를 해주셨다. 매번 보람을 느꼈던 순간들이었다.
하루는 청와대 다녀온 장관께서 커피 한잔 하자 하시기에 중요한 전화와 결재를 제외하고는 차단 지시를 하고 단둘이 장관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자, 차 한잔 하지!” 하신다. 그래서 소파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면서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말이야, 방금 대통령 만나고 오는 길인데 내가 곧 장관직을 그만 두어야 될 것 같아! 내 후임 장관은 누가 될 것 같은가?”
참으로 전혀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순간 무척 당황했지만 나는 서슴지 않고 즉시 “오자복 장군입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며 “아니, 대통령과 나만이 아는 사실인데 어떻게 알지?” 하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으신다.
오자복 장군은 내가 장관 보좌관으로 보직 전에는 군 생활 기간 중 면식조차 전혀 없었던 분이었다.
나는 솔직히 답변을 했다. “예, 제가 옛날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느껴왔던 사실로서 장관 임명권자는 나름 부려먹기 좋은 사람을 통상 장관시키는 것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개인에 대한 비하 불신 발언이었다. 나는 오자복 당시 합참의장님을 회의 참석 시나 결재 시에 인사 정도 드렸지 어떤 단순 대화조차도 없었으며 그분에 대해서는 오직 일방적인 어떤 단순 이미지 판단이었다. 당시 장관께서는 그 어떤 의사 표현도 없이 “이제 곧 이 취임식 준비를 해야 할 거야…” 했다.
이것이 커피 한잔 하며 나눈 짧은 대화의 전부였다. 사실 나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잘못된 속단이었지만 과거 군 생활 기간 중에 듣고 내가 실제 느꼈던 바 그런 예스맨 장관도 있었기에 오자복 당시 의장님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으로 답을 했었다.

88년 2월말, 정호용 장관의 이임식을 마치고 오자복 장관이 취임하셨다. 장관 보좌관은 장관의 최측근 장군이며 통상 군 생활을 통해서 관계가 깊고 신뢰하는 사람을 지명하는 것이 통례였다.
나는 약 1주일 모신 후 장관께 개인적으로 말씀을 드렸다. “장관님, 이제 저의 거취 문제를 결심해 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내 진심을 피력했다. 오 장관은 조용한 미소로만 응답할 뿐 묵묵부답 전혀 말이 없었다. 그 후 그러기를 두 번씩이나,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한 달 동안 모셔보고 확실한 판단을 해서 다시 언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 판단에는 나도 하급자로서 선택권이 당연히 있기에 내 판단에 모실 분이 아니라면 스스로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한 달 동안 깊이 관찰을 해서 모실 분인지 아닌지 확실히 파악을 한 후 결정을 하자’라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내 나름 세심한 관찰과 아울러 열심히 근무했다. 그 후 정확히 한 달 후에 결재와 전화를 모두 차단시키고 “장관님, 제가 장관님께 보고 드릴 사항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회의용 테이블에 마주앉아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자세로, “장관님! 오늘은 제가 장관님께 꼭 진정한 사죄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했다. 이에 오 장관님은 깜짝 놀라면서 의외의 표정으로 “최 장군! 그게 무슨 소리지?” 하신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일어나 손을 앞으로 모은 부동자세에서 진지한 어조로, “예, 다시 한 번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니 몹시 의아한 표정과 함께 앉아 얘기하라고 하신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동안 나름대로 장관님을 세심히 관찰했습니다. 저의 고유 권한으로 생각했기에 모실 분인지 아닌지를 깊이 관찰했습니다. 물론 장관님께서도 저를 데리고 있을 사람인지 아닌지 관찰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이 관찰 기간 한 달이 되는 날입니다. 장관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전혀 장관님을 깊이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건방지게도 저의 주관적 판단만으로 ‘인간 오자복을, 교활하고 비겁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크게 잘못된 저의 생각에 대해 진심어린 깊은 사죄를 드려야 하겠기에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마음속 깊은 사죄의 뜻을 피력했다.
그랬더니 수초간의 침묵 끝에 그분 특유의 ‘빙그레 웃음’과 함께 나온 의외의 한마디 말씀은, “야, 최 장군! 나와 같이 계속 근무하자!”였다. 그런 그분의 애정 어린 목소리에, 울컥한 심정과 크나큰 감동을 느낌과 동시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내 한마디는 ““예, 기꺼이 모시겠습니다”였다. 이와 동시에 ‘나를 관찰했다’는 뜻이 담긴 장관님의 몇 마디 말씀을 예상했었지만 그보다, “같이 근무하자”는 그 ‘신뢰의 그 한마디 말씀’이 내게는 무엇보다 더 소중했다.
나는 내친김에 “장관님,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하니 말해보라고 했다. “장관님 출 퇴근 시에 보좌관으로서 당연히 영접 배웅을 해드려야만 하지만 그 시점이 통상 업무적으로 분주하기 때문에 이는 제가 잘 판단해서 꼭 필요시에는 사무실 일을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장관님 하명이 있으실 경우에는 당연히 모시겠습니다” 했다. 즉시, 그리하라고 허락하셨다. 그 결과, 장관 출퇴근 시 무조건 의무적이고 기계적인 도열은 없었다. 특히 그 이후로부터 장관님과는 개인적으로나 업무적으로 신뢰의 관계가 더욱 깊이 형성되었으며 그 이후 신임 이상훈 장관 취임까지 6개월 간 오자복 장관 모시는 동안 참 행복하고 보람된 기간이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1988년 연말 12월 초에 신임 이상훈 장관(위 사진)님이 부임하게 되었다. 나는 그분과도 과거에 근무는 물론 면식조차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야말로 떠나야 할 시기로 결심했다. 장관 이 취임식을 마친 후 사무실 정리를 하고 퇴근하는데 삐삐 신호가 와서 보니 오자복 장관께서 보낸 신호였다.
전화를 드리니 그분 하는 말씀이, “내 오늘 이 취임식 마친 후 이상훈 장관과 둘이 저녁을 했는데 대화중에 최승우에 대해 물어보더라. 그래서 ‘최초 당신 동기생 정호용 장관 보좌관을 했기에 정 장관이 제일 잘 알 테니 정 장관한테 물어보라고’ 얘기했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정 장관 뵈러 가봐!”라고 했다. 참 고마운 말씀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심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장관님 저를 모르셔도 한참 모르셨네요. 왜 제가 정 장관님을 만나 뵈러 갑니까?” 하니 “야! 너 무슨 소리야, 지금이 네게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니 오늘 당장 만나 뵈러가!” 했다.
나는 새삼 깊은 정과 신뢰를 느낌과 동시에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장관님, 감사합니다만 저는 못 가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하며 전화를 먼저 끊었다. 이런 행위야말로 기본적인 결례행위였지만 당시, 너무나 울컥하는 마음으로 말이 막힐 것 같아, 더 이상 전화통화를 계속하기가 도저히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물론 정호용 장관님을 만나 뵈러 가지 않았다. 나는 평소 느낌 중에도 ‘정 장관님은 신뢰하는 부하들 마음속 생각을 앞서 알고 있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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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보좌관은 통상 소장 진급 0순위 직책이며 사단장으로 나가는 최우선 보직이었다. 다음날 신임 이상훈 장관께 인사드리는 개인 자리에서 조용히 얘기를 했다. 신임 장관님 존함은 잘 알지만 과거 군 생활 기간 중 대면 기회는 전혀 없었다. 내가 이제는 떠나야 할 시점으로 생각했기에 말씀드리며 허락해 달라는 내 뜻을 전해드렸다. 그러나 답이 없이 더 있어보라고만 하셨다. 그 이후 한 번 더 얘기를 했지만 역시 확답이 없었다. 얼마 후 장관 공관에서 한미 장성 주요 보직자 부부동반 만찬이 있었는데 내가 장관보좌관이기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장관 내외분께서 우리 부부를 반가이 맞이하셨다.
장관님은 “여보, 최 장군 이제 우리 식구 됐어요” 하신다. 우리 부부는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그때 나는 “아, 이제 정식으로 결정을 하셨구나!”는 생각과 함께 잘 모시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서 나는 세분의 국방부 장관을 연속 모시게 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장관 보좌관은 통상 군 생활을 통해서 장관과는 깊은 인연이 있고 개인적으로 잘 알고 신뢰하는 장군이 선택이 되는데 내 경우는 두 분 모두 전혀 처음 만나는 특이한 인연이었지만 매우 보람찬 근무였다. 그 이후 약 6개월간 소신껏 모셨다.
특히 이상훈 장관 부임 후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발생했던 깊은 추억이 담긴 ‘장군 휴게실 사건’(3월초 연재 예정)을 통해서 장관님과의 의사소통과 신뢰관계가 더욱 깊어졌다고 생각했다. 이상훈 장관님을 6개월 모시면서 영광의 소장 진급 후 1989년 6월 9일, 보병 제17사단장으로 취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