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어떻게 탄 훈장인데”…6.25참전 노병이 팬티 속에 간직한 훈장증

김점칠 하사의 4등 무공훈장증

어제 영천호국기념관에 갔다. 한국전쟁 당시 이동외과병원에서 활약한 선배님을 뵙기 위해 영천호국원을 찾았다가, 호국원 아래에 있는 기념관에 먼저 들르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영천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치열했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에 대비해 미군이 서사모아에 임시정부를 세우는 이른바 ‘신한국건설계획(New Korea Plan)’까지 검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방어선의 요충지인 영천을 북한군에 빼앗기자 워커 장군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그 계획을 귀띔했다. 영천을 탈환하면 계획을 백지화할 수 있느냐는 정 총장의 물음에 워커 장군은 그렇다고 답했다. 영천은 마침내 탈환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탈환 작전을 수행한 육군 제8사단의 지휘소를 찾았다.

전시관에는 영천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여덟 명의 훈장과 훈장증이 전시되어 있었다. 반짝이는 훈장들 사이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 아래 액자에 들어 있는 검게 빛바랜 종이 한 장이었다. 몇 번이고 접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김점칠 하사의 4등 무공훈장증이었다.

옆에 있는 화면을 눌렀다. 나의 어머니와 동갑인 1930년생 노인의 인터뷰가 나왔다. 그는 왜 훈장 자체가 아니라 훈장증을 보관하고 있었을까.

“돌격전 때 적군 한 개 분대 병력을 잡았어요. 내가 잡은 것이 아니라 우리 소대 병력이 다 함께. 혼자는 절대로 못 해요. 독불장군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디 가서든 얘기해요. 집단, 공동체의 힘으로 돌격도 하고 포로도 잡는 거지요. 혼자는 절대 불가능해요.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래요.”

그는 이어 훈장증을 어떻게 보관했는지 설명했다.

“팬티 옆에 비상용으로 주머니를 하나 만들었어요. 6·25가 끝날 때까지 거기에 넣어서 훈장증을 우리 집에까지 가지고 왔어요. 이것은 버릴 수가 없어요. 어떻게 탄 훈장인데, 그것이.”

전쟁터에서 훈장을 가슴에 달고 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훈장증만은 속옷 깊숙이 넣어 귀향하는 날까지 간직했다. 전투 중 목숨을 잃더라도 그것만은 몸에 지닌 채 죽겠다는 마음이었을까. 그 종이 한 장은 단순한 수여 증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함께 싸운 전우들의 기억이었고, 살아 돌아가야 할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김점칠 하사의 훈장증

나에게도 훈장이 두 개 있다. 9년 전 받은 과학기술훈장과 정년을 맞으며 받은 근정훈장이다. 아들들의 결혼식에는 두 훈장을 모두 달고 참석했다. 조카의 결혼식에는 약장을 달았다. 오랜 세월 쌓아온 노력과 업적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자랑스럽다.

그러나 전투에 나가 목숨을 걸고 받은 무공훈장은 그와는 다른 무게를 지닌다.

내 훈장은 살아온 세월과 이룬 일에 대한 보상이었다. 김점칠 하사의 훈장증에는 전장에서 함께했던 전우들, 그들과 나눈 생사의 순간, 그리고 그 종이를 몸에 지닌 채 집으로 돌아온 한 사람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기념관을 나서면서 다시 그 빛바랜 종이를 떠올렸다. 훈장은 가슴에 달지만, 어떤 훈장은 귀향하는 날까지 팬티 속에 간직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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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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