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기아우님 / 부디부디 / 건강하시고 多福 하소서 / 배한성 Dream!!!”
2025년 1월 28일, 배한성 형님이 내게 보낸 카톡이다. 나는 “형님은 저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한성 형님을 평생, 동행합니다!”라고 답했다. 형님에게서는 곧 “감사여여 ㅎㅎㅎ”라는 답장이 왔다.
서로 주고받은 짧은 문장을 다시 읽는다. 방송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글자 사이로 들려오는 듯하다. ‘드림’을 ‘Dream’으로 쓰고, 감사 인사에도 웃음을 붙이는 사람. 대한민국의 수많은 시청자에게는 맥가이버와 가제트 형사의 목소리로 익숙한 배한성이, 내게는 이렇게 다정한 형님으로 곁에 있다.
10월 3일 형님의 팔순을 축하하며 그가 걸어온 길과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돌아본다. 올해는 1966년 TBC 공채 성우로 방송에 첫발을 디딘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목소리로 쌓아온 긴 세월 앞에서, 그 목소리를 만들어온 삶부터 생각한다.

1부. 가난한 소년은 어떻게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었나
배한성의 어린 시절에는 가난과 생계의 무게가 일찍 찾아왔다. 아버지가 북으로 떠난 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을 돌봐야 했다. 중학생 때부터 신문을 배달하고 일을 하며 집안을 뒷바라지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학비가 없으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었다.
2015년 <위클리 공감> 인터뷰에서 그는 대학 입학과 방송국 입사를 자신의 영광의 순간으로 꼽았다. 중학교 동창이 친척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마련해준 덕분에 서라벌예술대학 방송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이원경 교수에게 연기의 기초를 배웠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됐다. 그러다 1966년 성우 시험에 합격했다. 동생만큼은 고등학교를 졸업시켜야 한다고 이를 악물던 청년에게 길이 열린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이야기할 때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어머니는 넉넉한 살림을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보았던 영화 이야기를 아들에게 실감 나게 들려주었다. 형편이 어려운 단칸방에서도 이야기는 펼쳐졌다. 등장인물이 되고 대사를 들려주는 어머니를 보며 소년은 영화와 연기의 재미를 익혔다.
나는 2017년 형님의 어머니 홍승희 여사가 별세했을 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려 아시아엔에 추모글을 썼다. 실제 어머니의 편지는 아니었다. 아들의 삶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 모자의 긴 세월을 헤아려보려 한 글이었다. 그때에도 마음에 남은 것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감성과 끼를 뒤늦게 알아보았다는 형님의 이야기였다. https://kor.theasian.asia/archives/176956
그렇게 성우가 된 배한성은 수많은 인물에게 한국어의 숨결을 입혔다. <맥가이버>와 <형사 콜롬보>, <형사 가제트>,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곁으로 왔다. 로빈 윌리엄스, 알 파치노, 더스틴 호프먼의 연기를 우리말로 만나는 데에도 그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 같은 일들을 타고난 좋은 목소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2024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그는 더빙할 영상과 대본을 미리 받아 인물의 표정과 상대 배역까지 분석했다고 밝혔다. 이전에 맡았던 인물과 어떻게 다르게 연기할지 고민하고, 자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녹음해두기도 했다. 짧은 광고 한편을 위해서도 여러 날을 고민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게 들린 한마디가, 그에게는 연구하고 고쳐온 결과였다. 인물마다 다른 감정과 호흡을 찾아내는 일이 그의 오랜 직업이었다.
그의 도전은 녹음실에 머물지 않았다. 2014년에는 스마트폰으로 만든 단편 <가제트>의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오래 품었다가 직접 실행한 것이다. 그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한 “내 인생은 호기심 천국이다”라는 말은 형님의 살아온 자세를 잘 보여준다.

2부. 스승의 은혜를 기억하고, 후배의 곁을 지키다
내가 형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10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직접 만나기 전부터 그의 방송과 목소리를 오래 듣고 살아왔으니, 처음 뵈었을 때에도 낯선 사람 같지 않았다. 이후 형님은 아시아기자협회와 아시아엔의 일을 한결같이 응원했다.
아자 행사에는 거의 빠짐없이 와주었고, 직접 진행을 맡아주신 때도 여러 번 있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내게 형님은 늘 든든한 빽이었다. 자신의 이름과 목소리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에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그 세월을 생각하면 ‘국민성우’라는 호칭 옆에 ‘너무나 고마운 형님’이라는 말을 함께 적고 싶다.
아시아기자협회가 2010년대 중반 5~6년간 지속해온 ‘내 마음의 스승’ 행사에도 늘 함께했다. 2013년 아시아엔 기사에는 청바지 차림으로 참석한 형님의 모습과 말이 남아 있다. 민병돈 장군이 “나더러 장군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나는 그저 뼛속까지 군인일 뿐 나는 가짜 장군”이라며 자신을 낮추는 이야기를 하자 형님은 “장군님이 가짜시라면 저는 생짜”라고 받아쳤다. 웃음을 건네면서 자신도 한껏 낮춘 말이었다.
이어 그는 중학생 때 허장강과 김희갑 같은 배우들의 대사를 따라 하던 자신을 격려해준 스승을 떠올렸다. 그 격려가 있었기에 성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했다. 스승으로 초대된 자리에서도 먼저 자신을 이끌어준 분들을 이야기했다. https://kor.theasian.asia/archives/80193
배한성 형님은 그 마음을 다음 사람에게도 전했다. 2015년 ‘내 마음의 스승’ 행사에선 당시 서울대 의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네팔 유학생 프라카스와 멘토 인연을 맺은 이야기가 실렸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외국 청년에게도 그는 인생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는 빈곤가정을 돕기 위한 ‘밥心콘서트’를 열었는데, 지구촌사랑의쌀문화예술단 단장을 맡아 자선음악회였다. 어린 시절 굶주림을 겪은 사람이 이웃의 끼니를 걱정하며 자신의 재능을 나누는 것이었다.
2013년 매거진N 창간 때 형님은 “N이 진정한 ‘No.1’이자 ‘Neighbor’이기를 바란다”는 축하 말씀을 주었다. 좋은 매체가 되면서 좋은 이웃도 되라는 뜻이었다. 그 자신이 오랜 시간 그런 이웃이었다. 매거진N의 평생독자로 함께해주었고, 어려울 때는 정신적·물질적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2025년 스승의 날을 앞두고 나는 형님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자상하고 정확한 형님으로 길을 열어주었다고 썼다. 이에 형님은 “오랜 우정에 늘 감사드립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고맙다고 말씀드리면 형님은 “내가 더 고맙다”고 했다.
지난 5월 스승의날에도 같은 마음으로 인사를 올렸다. “저에게는 늘 스승 같은 형님이십니다.” 여러 해 동안 함께하며 얻은 마음을 그 한 문장에 담았다.
3부. 함께 가던 저녁길, 그리고 오래 남기 바라는 형님 목소리

지난 몇 년 형님은 몸이 좋지 않아 활동을 몹시 자제했다. 내가 안부를 여쭐 때 건강 회복을 먼저 기원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방송과 강연, 행사에서 사람을 만나던 형님에게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날들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오랜 동료를 떠나보내는 아픔도 겪었다. 송도순 선생이 2025년 12월 31일 별세한 것이다. 두 분은 1990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17년간 TBS ‘함께 가는 저녁길’을 진행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쉼터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두 목소리였다.
송 선생 별세 이튿날 형님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송 선생과 직장에서 만났지만 가족 못지않은 사이였다”고 했다. 아내를 잃었을 때 송 선생이 아이들을 이모처럼 돌봐주었다는 사연도 전했다. 회복하면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별세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오래 호흡을 맞춘 동료의 부재에는 함께 살아온 시간도 들어 있다. 방송에서 주고받던 말, 가족을 챙겨준 마음, 다시 만나 나누려던 식사까지 한꺼번에 떠올랐을 것이다. 형님이 그 이별을 많이 힘들어했던 까닭을 나는 그렇게 헤아린다.
형님과 나눈 카톡에는 갈수록 건강을 묻는 인사가 늘고 있다. 엊그제 나는 북토크 소식과 함께 10월 3일 팔순을 미리 축하드리며 “형님, 개천절에 팔순 축하 식사 모시겠습니다” 했더니 “내가 모셔야지요. 날짜 잡자구”라는 답이 돌아왔다. 늘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형님이다.
올해 설날에도 내가 건강과 활동을 응원하자 형님은 이렇게 답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福도 많이 지으소서!!!”
복을 많이 받으라는 인사에 익숙한 내게, 복을 많이 지으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받은 것을 기뻐하는 데 더해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만들어주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형님이 행사에 와주고, 후배를 격려하고, 이웃을 도와온 시간을 그 말과 함께 떠올린다.
지난해 1월에는 삶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늘을 충실히 살며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함께 돌아보자는 긴 글도 보내주었다. 형님이 직접 쓴 글인지, 좋은 뜻에 공감해 전달한 글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뒤에 따로 붙인 “상기아우님”이라는 호칭과 건강하고 다복하라는 인사는 분명 형님이 내게 건넨 마음이었다.
나는 형님의 목소리가 길이 남기를 바란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라디오와 시 낭송에 담긴 목소리뿐 아니라 후배를 부르고 안부를 물으며 웃음을 건네던 목소리도 함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게 ‘배한성’이라는 성우와 그가 살아온 시간을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
그가 간직해온 방송 녹음과 시 낭송 음반, 작품과 인터뷰는 무엇보다 소중한 기록물이다. 여기에 동료와 후배들이 기억하는 이야기도 더해지기를 바란다. 어떤 인물을 어떻게 연기했고, 누구에게 배웠으며, 다음 사람에게 무엇을 건넸는지 오래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배한성 형님은 타인의 삶을 목소리로 전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졌고, 성우가 되어서는 수많은 인물의 감정을 우리말로 들려주었으며, 내 곁에서는 후배의 일을 자기 일처럼 응원해주었다. 내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형님의 모습은 그 세 가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한성 형님, 팔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형님을 이끌어준 스승들의 마음도 이날 함께 돌아봅니다. 부디 몸과 마음이 회복되어, 형님의 목소리를 더 오래 가까이에서 듣게 해주십시오.
“배한성 Dream!!!”
그 다정한 인사를 앞으로도 오래 받아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