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근의 두코전투와 채명신 측근 문명찬의 증언
민병돈 “영웅의 명예와 역사의 진실 사이에서 침묵을 선택했다”
이 글은 육군사관학교 15기 출신으로 특전사령관과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낸 민병돈 예비역 중장이 2026년 6월 6~8일 충북 영동의 한 펜션에서 이상기 아시아엔 발행인과 황건 성형외과 전문의·이화여대 초빙교수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이상기가 재구성한 것이다. 한국군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1926~2013)에 관한 두 일화를 통해 민 전 교장이 군인의 명예와 역사적 평가 사이에서 겪은 고민을 기록했다. 일부 내용은 민 전 교장이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로, 사건 발생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인명·계급·시기·훈장 수여 경위 등에 기억의 착오가 있을 수 있다. 이 글은 구술자의 기억과 판단을 역사적으로 확정된 사실과 구분해 소개하며, 확인되지 않은 의혹의 구체적인 내용은 싣지 않았다. <편집자>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 역사에서 베트남전쟁을 상징하는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베트남 전선에서 한국군을 지휘했고, 전역 후에는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 부하와 전우를 잊지 않은 지휘관으로 기억돼왔다.
2013년 세상을 떠나면서는 자신을 파월 장병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이 아닌 일반 병사 묘역에 안장된 사연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민병돈 예비역 중장이 기억하는 채명신에게는 또 다른 모습도 있다. 지난 6월 충북 영동에서 민 장군은 채명신과 관련된 두 가지 일화를 들려줬다. 하나는 자신의 육군사관학교 동기 이충근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채명신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육사 선배 문명찬에게 들은 이야기다.
민 장군은 채명신의 군사적 공적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영웅이 갖는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록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졌다. 영웅의 공적과 인간적 평가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증언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사단장님, 쇼하지 마십시오”…장군 앞에서 직언한 젊은 소위
민병돈 장군의 육사 동기 가운데 이충근이라는 장교가 있었다. 함경도 출신으로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었다. 계급이 낮다고 해서 할 말을 삼키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충근이 소위였을 때 채명신은 사단장이었다. 사단장과 소대장은 하늘과 땅만큼 계급 차이가 컸다. 당시에는 정규 육사 출신 장교가 많지 않아 군 지휘관들이 젊은 육사 출신 장교들을 각별히 아끼기도 했다.
채명신 사단장도 간혹 육사 출신 장교들만 따로 모아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이충근 소위가 채명신에게 말했다. “사단장님, 쇼하지 마십시오.”
소위가 장군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민 장군은 이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껄껄 웃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라면 ‘역시 소위는 다르구나. 계급이 올라가면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줬을 겁니다.”
그러나 채명신의 반응은 달랐다고 한다. 그는 이충근의 말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육사를 나왔느냐”는 식으로 화를 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됐다는 것이 민 장군이 전해 들은 이야기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베트남에서 다시 만났다. 채명신은 주월한국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됐고, 이충근은 전선의 장교가 돼 있었다.
두코전투의 밤, “무서웠느냐”는 질문에 “무서웠습니다”
이충근이 이름을 알린 것은 두코전투였다. 어느 날 밤, 한국군 중대 진지를 향해 훨씬 많은 적 병력이 공격해왔다. 이충근의 회고에 따르면 적이 한국군 부대를 전멸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기습한 전투였다. 당일까지 부대를 지휘한 이충근은 후임 중대장이 부임 직후 피습당해 목숨을 잃어 대신 지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충근은 “내가 계속 지휘한다”고 선언하고 전투에 나섰다.
진지는 이미 단단히 준비돼 있었다. 장병들은 진지공사를 마쳤고, 반복 훈련을 통해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작전계획도 세워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실제로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상황은 달랐다.
어둠 속에서 총성이 이어지고 적은 사방에서 진지로 접근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적과 싸우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충근도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다고 진지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후임 중대장이 전사한 상황에서 병력을 지휘했고, 장병들은 밤새 공격을 막아냈다.
날이 밝은 뒤 헬리콥터가 조명탄을 떨어뜨리고 주변을 살펴보자 비로소 전투의 규모가 드러났다고 한다. 진지 주변에는 수많은 적군이 쓰러져 있었다. 포로를 심문해보니 공격에는 두 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충근 자신도 그때까지 얼마나 큰 전투를 치렀는지 몰랐다고 했다.
전투 소식을 들은 채명신 사령관이 현장을 찾았다. 격려를 위해 나온 자리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소위 시절의 불편한 기억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채명신은 이충근에게 물었다. “무서웠느냐?” 이충근은 솔직하게 답했다. “예, 무서웠습니다.”
민 장군은 이 대목에서 되물었다. “전쟁터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채명신은 그 대답을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어 앞으로 다른 부대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나면 갈 것이냐고 물었다. 이충근은 상급부대의 명령이라면 가야 한다고 답했다. 군인으로서 당연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채명신은 또다시 화를 냈다는 것이 민 장군의 설명이다.
전투가 끝난 뒤 이충근의 공적에 대한 훈장 상신이 이뤄졌다. 현장에서는 높은 등급의 무공훈장이 건의됐지만 사령부를 거치면서 훈격이 낮아졌다는 것이 민 장군이 들은 이야기다. 결국 이충근은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뒤이어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측에서 이충근의 전공을 높게 평가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 ‘베트남전의 영웅 캡틴 리’에게 미국 측 훈장을 직접 수여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한국군 내부에서도 그의 전공을 다시 살펴보게 됐고, 더 높은 무공훈장을 수여하는 절차가 진행됐다는 것이 민 장군의 기억이다. 다만 실제 훈장 상신과 조정 과정에 누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관련 기록을 통한 확인이 필요하다.
민 장군은 이충근에게 직접 전투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민 장군이 독일에서 공부하다 귀국한 뒤 서울의 한 불고기집에서 만났을 때였다. 이충근은 두코전투의 상황과 채명신과의 관계, 훈장에 얽힌 과정을 들려줬다.
“이충근은 자신을 영웅처럼 꾸며 말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도 전투가 끝난 뒤에야 알았고, 채명신 장군이 무서웠느냐고 묻자 무서웠다고 답했다는 겁니다. 그 솔직함이 그 사람다웠지요.”
민 장군은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충근은 사단장 앞에서도 할 말을 했고, 전쟁터에서는 중대장이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지휘했다.
소위 시절의 직언은 상관의 미움을 샀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코의 밤에는 그의 직선적인 성품과 책임감이 부대를 지키는 힘이 됐을 것이라는 게 민 장군의 평가다. 이충근은 훗날 중령으로 전역했다고 한다.
채명신의 오랜 측근이 찾아와 털어놓은 이야기
채명신에 관한 또 하나의 이야기는 훨씬 뒤에 들었다고 한다.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육사 선배 문명찬이 민병돈 장군을 찾아온 것이다. 문명찬은 민 장군보다 육사 1년 선배였다. 베트남에서 채명신 사령관의 특별보좌관으로 약 4년 반을 함께 지냈다고 했다. 잠시 곁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채명신의 지휘와 생활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인물이었다.
문명찬은 병이 깊어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민 장군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채명신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들려줬다. 그의 말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채명신이 군인으로서는 영웅이라는 평가였다. 다른 하나는 개인으로서 존경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문명찬은 금전과 사생활에 관한 문제를 언급했다고 한다. 민 장군은 그 내용을 들으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문명찬이 채명신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보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가볍게 흘려듣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
문명찬은 민 장군이 글을 쓰고 언론에 영향력이 있으니, 자신이 들려준 내용을 세상에 알려주기를 바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민 장군 역시 부정과 돈 문제를 매우 싫어한다고 했다. 잘못한 사람이 영웅이라는 이유로 비판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공적이 크다고 해서 사적인 잘못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문명찬에게 들은 이야기는 당사자의 반론을 듣거나 객관적 자료로 확인한 내용이 아니었다. 가까운 측근의 증언이라는 무게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한 사람을 단정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옳은지도 고민스러웠다고 한다.
더 큰 고민은 ‘영웅’이라는 존재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뤄야 하느냐는 데 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영웅을 굳이 내가 깎아내려야 하는가”
민 장군은 일본을 여러 차례 다니면서 각 지역에 무장과 전쟁 영웅을 기리는 사당과 기념물이 많은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곳에 모셔진 사람들이 모두 흠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쟁을 일으켰고, 어떤 사람은 오늘의 기준으로 비판받을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싸운 인물들을 기억하고 영웅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수많은 외침을 겪고도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인물들을 충분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비롯해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영웅을 세우는 일보다 그를 끌어내리는 데 더 익숙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었다.
채명신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영웅이 돼 있었다. 민 장군이 들은 이야기를 공개하면 파장이 클 수 있었다. 자신이 전직 육사교장이자 장군 출신이었고 언론에 글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제기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물었다고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영웅을 굳이 내가 깎아내려야 하는가. 그의 공적과 허물 가운데 무엇을 후대에 남겨야 하는가.”
결국 민 장군은 문명찬에게 들은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채명신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도 아니었다.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자신의 이름과 영향력을 통해 공개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영웅이 드문 나라에서 이미 국민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인물을 굳이 무너뜨릴 필요가 있느냐는 판단도 작용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당시의 침묵이 옳았는지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영웅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일인가. 아니면 공과 과를 함께 기록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역사에 남기는 방법인가.
민 장군이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이었다.
군인의 명예와 역사의 진실 사이에서
이충근과 문명찬.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채명신을 경험했다. 이충근은 전장에서 싸운 부하 장교였고, 문명찬은 사령관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사람이다. 한 사람은 상관 앞에서도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던 군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민 장군에게 전하려 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채명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민 장군은 이들의 증언만으로 채명신의 삶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채명신이 세운 공적은 그것대로 기록하고, 그의 지휘 아래 싸웠던 수많은 장병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한 사람의 공적이 크다고 해서 그에 관한 모든 평가를 거기서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실이었다. 영웅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확인되지 않은 증언만으로 한 인물의 명예를 무너뜨리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 민 장군의 생각이었다.
민 장군은 군 생활을 하면서 명예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왔다. 군인의 명예는 계급의 높낮이나 훈장의 등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부하를 어떻게 대했는지, 두려움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어떻게 감당했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충근의 이야기는 민 장군에게 오래 남아 있었다. 이충근은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한편 문명찬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또 다른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내용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공적과 명예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신중함은 서로 다른 덕목일 것이다.
민 장군은 결국 채명신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다. 그 선택에는 영웅이 드문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에 대한 두려움, 확인되지 않은 증언을 기사로 만드는 데 대한 경계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침묵이 언제나 옳았다고 자신하지는 않았다.
채명신은 한국군 역사에서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것과 그의 삶 전체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진정한 역사 기록은 영웅을 무조건 떠받드는 것도, 한 가지 허물로 모든 공적을 지우는 것도 아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확인하고 남기는 일이다.
지난 6월 영동에서 민병돈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채명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또 다른 면모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인의 명예를 평생의 가치로 여겨온 한 노병이 영웅의 공적과 인간적 평가 사이에서 겪은 고민이었다.
민 장군은 그때 침묵을 선택했다. 그 침묵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단언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남았다. 영웅의 명예를 지키는 일과 역사의 진실을 지키는 일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