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이 국가선진화 걸림돌 돼선 안돼”
“언론·교육·학술·과학·예술이 최선진(最先進) 수준이 되면 한국도 고질적인 정치 후진성도 극복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언론이 이 선진화 선도 대열에 참여하기 위해선 고급지로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 언론이 전근대 후진 질곡(桎梏)의 늪에서 헤아나지 못하면 다른 전략적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비판받을 것이다.”
2025년 4월 1일 87세로 타계한 남시욱 언론인은 30년 전 1995년 문화일보 사장으로 취임하며 신문 추락의 위기를 경고하고, 고급지 전환을 타개책으로 제시했다. 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을 역임한 남시욱 언론인은 다음과 같은 업적과 함께 후배 언론인의 귀감이 되는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➀1959년 동아일보 공채 1기 기자로 권위주의 정치에 맞서 언론 본령을 지킨 언론인 ➁신문을 전문가들이 참여한 공론장(公論場)으로 끌어올린 2면 오피니언 페이지증면·일본신문의 지문(指紋·바탕무늬·지몬)을 털어버린 편집 쇄신 등으로 고급지 전환을 시도한 선도자 ➂보수·진보 정치사 체계화·6·25전쟁사·취재보도론 등의 저술 ➃인촌상·편협인상 등 권위 있는 언론상 수상자.
1938년 경북 의성 출신인 고인은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9년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동아일보 기자·부장·출판국장·편집국장·논설실장·동경특파원·상무이사를 거쳐 문화일보 대표이사 사장, 관훈클럽 총무,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고려대·성균관대 언론학 석좌교수,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2024년까지 66년 언론 외길을 걸었다.
언론사 개혁과 고급지 전환의 성과

언론 미래 위한 신뢰 및 체제 구축
언론자유가 일부 유보되었던 박정희 권위주의 시대에 그 대척점에 있던 동아일보의 남시욱 사회부기자는 필화사건으로 구속 송치되기도 했다. 고인이 1962년 3월 8일 서울 삼양동 판자촌에서 63세 노인이 굶주림과 추위로 숨졌다고 사회면 머릿기사로 쓴 기사를 북한방송이 인용해 박정희 정부를 비난하자 반공법상 이적 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난 것이다. 그런 박 정권의 언론탄압 경험에도 남시욱 언론인은 1966년 여름부터 1967년 말까지 청와대를 출입하며 맞담배를 피우며 가까이서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증언을 2017년 대한언론이 펴낸 <취재현장의 목격자들>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박대통령의 경제개발에 대한 헌신은 높이 평가하고 테러 수준의 언론 탄압에 대해서는 비판 고발 했다. 카터 대통령 방한 당시 지쳐있던 박대통령을 남시욱 언론인은 동정적인 시각으로 서술했다. 그는 1987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부임 초기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전모를 동아일보가 추적 보도해서 5공 정권의 강권정치 마감에 일조했다. 동아일보 박종철군 사건 보도는 군사권위주의 통제에 순응 추락했던 언론의 체면을 세워준 언론의 감시기능 회복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80년대 중반 <신동아> 획기적 발전 견인차
1983년 5월 동아일보 출판국을 맡은 고인은 1986년 12월까지 3년간 신동아 부수를 30만부까지 끌어올려 종합월간지 전성시대를 열었다. 남시욱 국장은 회사가 인재 양성을 위해 다양한 업무를 경험케 한다고 생각하고 출판국장직에 최선을 다해서 봉사했다. 박정희 정부의 ‘동아투위 사태‘와 신군부의 ’언론인 해직 사태’로 신문이 좌고우면할 때 남시욱 출판국장은 이경재 강성재 해직기자를 출판국 기자로 복귀시켜 신문이 금기시했던 정치사건 쟁점들을 신동아에 탐사보도해서 언론계에 충격을 주었다.
<장도영국가재건최고회의장 회고록>등이 화제가 되었으며, 1985년 2.12총선을 심층 분석한 3월호가 20만부를 찍어 잡지 저널리즘의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신한민주당의 전부’(이경재), ‘이민우 신한민당 총재 인터뷰’(강성재), ‘영파워 이철은 누구인가’등이 5판을 찍게 한 기사들이었다. ‘김대중과 김영삼’ ‘3김씨 거취와 정국 풍향’등을 다룬 5월호도 25만부를 발행했다. 신군부 언론 통제로 금기시했던 김영삼 김대중 관련기사를 신동아가 과감히 보도해서 신동아 위세가 본지를 압도했다. 노재봉 박우희 이정복 조순 고은 김동길 김영작 등이 남시욱 출판국장 시절 신동아에 등장한 필진이었다. <광주사태> <부마사태> 탐사보도도 신동아 부수 화장에 기여한 특집이다.
남시욱 언론인이 문화일보 사장으로 1995년 말 취임해서 단기간에 이루어낸 2면 오피니언 페이지 정착과 일본식 지문(指紋·지몬·바탕무늬)을 털어버린 편집 쇄신 및 옴부즈맨 제도 도입 등 한국 신문 고급지 전환과 선도는 한국언론사에 기록될 업적이다. 1995년 12월 1일 취임식에서 남시욱 사장은 “세계 권위지에 뒤지지 않는 최고 수준의 고급지를 만들어 정론지(正論紙) 역할을 하자”고 역설하고 1996년 첫호부터 2면의 오피니언면을 신설하고 고급지 제작위원회가 제시한 옴부즈맨(ombudsman)시스템을 도입한 편집제작협의회 신설과 지면쇄신을 단행했다.
150여명의 최고 전문가가 기고한 문화일보 포럼은 한국의 공론구조를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시도로 모든 신문이 따라왔다. 고급지 제작위원으로 존 메릴 장원호(미주리대교수) 유재천 오택섭 김정기 김정탁 등의 언론학자와 현승종 고려대 총장, 조용중 원로언론인, 박석흥 부국장이 참여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문화일보 오피니언이 송복 박재창 손호철 등 비판적 지식인을 대거 필진으로 포진시켜 정부를 앞장서 비판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문공부 장관이 문화일보 사장에게 신문제작 방향 전환과 제작자 교체를 강요하기도 했다.(김진현 회고록 446면) 남시욱 언론인은 조용중 김은구씨 등 대한언론인회 회원과 함께 반체제세력의 가짜뉴스 공격을 받았던 문창극 언론인 변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남시욱 언론인은 저서로 <항변의 계절> <체험적 기자론> <인터넷시대의 취재와 보도> <6.25전쟁과 미국> <‘한국 보수세력 연구> <한국 진보세력 연구> <고재욱 평전> <한미동맹 탄생 비화> <조용중 추모문집>등을 펴냈으며, 동아대상· 위암 장지연언론상·인촌상(언론출판부문)·제1회 자랑스런 편협인상 등을 수상했다.
삼가 고인을 추모하며 한국 언론계에 고인 같은 언론인이 계속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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