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문화혁명 당시 군중집회 모습

[온바오] 이제 보시라이(薄熙?) 이야기는 저잣거리 어린애들도 주고받을 정도로 흔한 ‘심심풀이 땅콩’이 됐다. 한국 언론매체도 연일 지면을 통해 보시라이, 보시라이를 들먹이는 중이다. 요즘 중국 특파원들의 고충이 적잖을 것이다. 한국 본사에서는 보시라이와 관련된 기사라면 뭐든지 긁어내 보내라고 닦달을 하지, 소스는 한정되어 있지……. 베끼고 또 베끼는 식의 기사가 줄을 잇고,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재탕삼탕을 거듭하고, 급기야는 “보시라이, 내연녀만 100명”이라는 식의 들으나마나한 이야기까지 기사랍시고 얼굴을 내민다.

지긋지긋한 보시라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다만, 오늘은 ‘문혁’을 돌아보자.

원자바오(?家?) 총리가 보시라이 처리를 염두에 두고 “정치개혁에 성공하지 못하면 문화대혁명 같은 비극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허걱!’하는 채팅 용어가 절로 흘러나왔다. 언젠가 문혁에 대한 책을 쓴다면 제목을 ‘13억의 트라우마 – 문화대혁명’이라고 붙이고 싶었는데, 중국 최고지도부의 입에서 감히(!) 문혁이라는 용어가 튀어나오다니, 가히 상상 밖의 일이다.

문혁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려면 정말로 책 한 권을 쓴다 해도 모자랄 것이다. 이론적으로 접근하자면 사회주의 영구혁명론이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까지 집어넣어야 할 것이고, 사례나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하여도 수백 수천가지 눈물겨운 이야기가 줄을 이을 것이다. 중국 현대사의 복잡 미묘한 내막을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되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어려운 이야기는 접어두자. 다만 문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희끄무레한 윤곽만을 그려보자. 자, 가슴 아픈 중국 현대사의 치명적인 한복판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다.

#1 “나는 지옥을 보았다”

존경하는 중국 지식인 가운데 한 분인 지센린(季?林) 교수의 대표작으로 ‘우붕잡억(牛棚??)’이라는 책이 있다. ‘중국을 공부하고 싶은데 무슨 책부터 읽어야 하냐’고 물어보는 분들께 반드시 권해 드리는 책이다. 지 교수님의 회고록이다. 문혁시기 겪었던 일들을 애잔하게 담고 있다.

친절한 <네이버>에 보면 이 책의 처음 서른 페이지 정도와 마지막 쉰 페이지 정도를 ‘본문보기’ 기능으로 미리 볼 수 있는데, 그 부분만 읽어보아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그리고 지센린 교수의 높은 도덕적 품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체도 대단히 유려하다. 중국어 공부를 하려는 분들에게도 원문으로 추천할만한 책이다. (한국에서는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책의 초고가 1992년에 완성되었고, 책이 정식으로 출판된 해는 1998년이라는 점이다. 문혁은 1976년에 종결되었다. 어찌하여 지센린 교수는 문혁이 끝나고도 16년 동안이나 이런 책을 쓰지 않았던 것이며, 원고를 다 쓰고도 무엇 때문에 6년 동안이나 서랍 속에 묵혀두었던 것일까? 서문을 읽어보면 그 답이 나온다. 서문만이라도 꼭 한 번 읽어보시라. 나는 서문을 읽으면서도 많이 울었다. 지 교수의 인격에 감복하여 울었고, 중국이 슬퍼 울었다.

책의 첫 장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지 교수는 오랫동안 ‘지옥비교학’이라는 연구를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서양의 지옥과 동양의 지옥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말씀인즉, 전설 속에 등장하는 서양의 지옥은 단조로운데 동양의 지옥은 굉장히 구체적이란다. 특히 불교에서 묘사하는 지옥은 “칼산, 불바다, 기름솥, 큰도끼, 소머리, 말얼굴 등 여러 인물과 도구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 교수는 말한다. 왜 그러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비교하는 연구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 교수는 이러한 뜻을 담아 넌지시 말씀하신다. 이제는 그러한 비교 연구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건 바로 ‘현실속의 지옥’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문혁이다. 문혁이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대충 상상이 될 것이다. 덩샤오핑(?小平)도 그랬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언제냐”는 일본 총리의 질문에 ‘문화대혁명 시기’였다고 답했다. 틀림없는 말일 것이다.

#2 일요일이 ‘성기일’이 될 뻔한 사연

언젠가 중국 조선족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는데 이러한 대목이 나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적이 있었다. (책의 제목은 잊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소수민족이 상당한 박해를 받았다. 조선족들 또한 그러했는데, 한족들이 홍위병 완장을 차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밀려 들어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들었다. 그때에 조선어(한국어)도 수난을 당했는데,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식의 요일 표기법을 바꾸라고 요구하였다 한다. 알다시피 중국어로 월요일은 싱치이(星期一), 화요일은 싱치알(星期二), 수요일은 싱치싼(星期三) 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간편하게(?) 1, 2, 3, 4로 요일을 표기할 수 있는데 조선족들은 불편하게(?) 월요일이니 화요일이니 하는 표기법을 고집하고 있으니 그것을 바꾸라는 불호령이렷다. “성기일, 성기이, 성기삼…… 조선어로 이렇게 바꾸어 부르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다행히도 그런 황당한 지시를 다음과 같은 변명으로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기일, 성기이, 성기삼…… 그렇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싱치르(星期日 ; 일요일) 또한 조선어로는 ‘성기일’이 됩니다. 그리하면 일요일도 성기일이고, 월요일(星期一)도 성기일이 되어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하니,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까닥 잘못되었으면 오늘날 조선족들은 월요일을 ‘성기일’이라 부를 뻔 하였다. 이것이 문혁이다.

#3?13억의 트라우마

몇 해 전 우리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키가 180cm 정도는 되었다. 중국어가 완전 초급이었던 못했던 시절이라 그냥 농담으로 간단히 “농구 선수하셔도 되겠다”고 말하니 “한때는 농구 선수였다”며 슬프게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슬픔의 의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한번은 아주머니가 “나에게도 한국 사람의 피가 섞여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됐다.

나중에 들으니 아버지는 일본 사람이고 어머니는 조선 사람이며 자신은 다롄(大?)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다롄이 일본의 조차지였던 시절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무슨 사연인지 신(新)중국이 들어선 후로도 중국 대륙에 정착하게 된 가족인가 보다. 자매들이 모두 장신이어서 언니가 성(省) 대표 농구선수였고 자신도 예비 후보로 뽑혔다고 하는데, 문혁때에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어 언니는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고 자신도 농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고난을 당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주머니는 많이도 울었다. 바로 문혁 이야기다. ‘노동개조’, ‘혁명화’ 또는 ‘하방(下放)’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지로 쫓겨나 고생하였다.

아주머니는 문혁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무서워했다. 떠올리기 싫으면서, 분노가 치밀면서, 한편으론 두려운 존재 – 트라우마, 이것이 중국 인민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문혁의 그림자다.

#4?그저 ‘고난을 겪었다’

나는 50대 이상 중국인들의 이력을 살펴볼 때는 ‘그 사람이 1960~1970년대에 무엇을 했는지’ 검색해보는 버릇이 있는데, 그러다보면 가슴 아픈 흔적을 만나게 된다.

예컨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장군 계급장을 달았던 리전(李?) 소장의 기일이 3월11일인데, 그날을 맞아 바이두(百度)에서 그녀의 일대기를 찾아보니 1960~1970년대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나중에 다른 자료들을 뒤적거려보니 역시나(!) 지방으로 쫓겨나 갖은 고초를 겪은 바 있었다. 중국의 여성 지도자들 가운데 문혁 시기에 수난을 겪은 사람들이 많다. 장칭(江?, 마오쩌둥의 아내)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가 흔하다. 10년 사이의 기록이 텅 비어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생 경력에 대한 설명이 1950년대에서 1970년대로 훌쩍 건너뛴다. 무슨 일인지 설명은 안하고 ‘1960년대에는 고난을 겪었다’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눈치껏 ‘문혁으로 고생했나 보구나’하고 이해해야 한다. 아직도 중국에서는 문혁이라는 말조차도 쉽게 꺼내지 힘들다.

억압하는 편에 섰건 박해받는 편에 섰건, 어쨌든 수억의 중국인이 그 ‘10년 동란’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싸웠는데, 아무도 거기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다. 한국 같았으면 수많은 기록문학이 쏟아져나올 법도 한데, 그 역사적 상처의 넓이와 깊이에 비해 남아있는 기록은 한심할 정도로 미미하다.

홍위병이 쓴 반성의 기록이 적은 것은 그렇다고 치자. (홍위병이 지난 과거를 반성하면서 쓴 책은 2~3권 정도가 된다.) 피해자들도 입을 꼭 다문다. (피해자들의 기록도 녹픽션과 픽션을 포함하여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왜 그러한지, 그것을 이해해야 중국인들의 습성을 이해할 수 있고, 오늘의 중국을 이해할 수 있다.

#5?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언젠가 원자바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중국인에게 19세기는 치욕의 시대였고, 20세기는 회복의 시대였으며, 21세기는 우리의 우수성을 떨치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민초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더욱 그럴 듯 하다고 본다. “중국공산당은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는 전쟁을 했고,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는 투쟁을 했으며, 1970년대에서 지금까지는 경쟁을 해왔다.” 2008년 한국의 어느 신문에 실린 자오후지(?虎吉) 베이징대 교수의 칼럼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전쟁, 투쟁, 경쟁으로 이어진 100년……. 그러한 삼쟁(三爭)의 소용돌이 속에 한없이 상처만 입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오늘날 13억 중국인이다. 문혁은 그러한 ‘투쟁’의 현대적 결정판이었다. (확대하자면, 중국 반만년 역사가 그러할 것이다.)

누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지도 모른 채 서로 물고 뜯으며, 그렇지 않아도 한심스런 살림살이를 뿌리까지 송두리째 흔들고 뒤집어놓으며, 부수고 때리고 불태우면서 완전히 나라를 거덜냈던 광란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개혁개방은 그러한 침묵의 카르텔 위에 출발하였다.

# 덧붙이는 말, 루쉰이 1960년대를 살았다면?

문혁을 비롯한 중국 현대사의 속살을 영화를 통해 빠르게(?) 알고 싶다면 <活着>을 권한다. 한국에는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중국에서 살아가는 교민 가운데 영화 ‘인생’을 보지 않은 사람은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라고까지 말하더라. 조금 지나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봐두어야 할’ 영화다. 장이머우(???)가 감독하였고, 거요우(葛?)의 연기가 정말 압권이다.

그 유명한 위화(余?)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 <活着>는 한국에는 <인생> 또는 <살아간다는 것>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위화의 다른 소설 <형제>와 <허삼관매혈기> 같은 작품도 읽어보기 바란다. 재미있다. 그리고 슬프다.

논픽션으로 문혁의 실상을 듣고 싶은 사람은 위에 소개한 지센린 교수의 <우붕잡억>과 함께 니엔쳉의 <상하이의 삶과 죽음>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니엔쳉의 책은 그야말로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또한 글쓴이의 ‘인격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문혁의 전개과정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산케이신문에서 펴낸 <모택동 비록>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런데 중국에 살고 있는 교민이라면, 그 책이 정식적인 통관절차를 밟아 중국에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슬픈 현실이다.

글을 마치며 하나만 상상해보자. 최근 <온바오>를 통해서도 보도된 바 있고,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로는 단연 루쉰(?迅)이 꼽히는데, 루쉰이 1936년에 죽지 않고 1950~1960년대를 거쳐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반동으로 몰려 죽었을 것이다’에 90%의 가능성을 걸겠다. 아마도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 시기를 못 넘겼을 것이다.<온바오/곽대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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