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이상설⑤] 충북 진천에 생가 복원, ‘현대수학 요람’ 되길

[아시아엔=이상구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이상설에게 일제의 조선통감부가 사형을 구형한 후, 이상설의 수학교과서 <산술신서>는 거의 금서에 가까운 대우를 받다가 1910년 한일병탄 후에는 모두 수거되어 흔적을 감춘다.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되자 서전서숙은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곧이어 조선통감부 간도출장소가 설치되어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지며 학교운영이 어려워진다. 이어 더욱 강화된 일제의 탄압으로 서전서숙은 문을 닫게 된다.

이후 교육계몽사업을 뒤로하고 직접적인 항일 독립투쟁에 매진하게 된 이상설은 1908년부터 미국에 1년여 동안 머무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였다. 또한 각지의 교포를 설득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또한, 1908년 8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이승만과 연해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4월 국민회(國民會) 총회장 최정익(崔正益) 등과 국민회의 제1회 이사회를 열고 구체적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鄭在寬)과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항카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에 땅 45방(方)을 사서 100여 가구의 한국 교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유인석과 상의해 이 해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소를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1910년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9월 일제와 교섭한 러시아에 의해 연해주 니콜리스크(雙城子)로 추방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1911년 김학만·이종호(李鍾浩)·정재관·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업신문>(勸業新聞)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장기영(張基永)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14년 러일전쟁 5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수립된 ‘대한 광복군정부’의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된다. 1915년 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만주, 러시아, 유럽과 미주 지역을 넘나들며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망명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외교적 노력과 해외 독립운동단체의 조직화에 힘썼으나 조국의 독립을 못 보고 1917년 3월에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에서 48세를 나이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이상설에게는 수학교육자 및 독립운동가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으며, 2005년 국가보훈처는 12월의 독립운동가로 그를 선정하였다.

48세에 연해주에서 죽으면서 그는 민족의 장래에 대해 우려하면서,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의 모든 것을 모아 불태우고, 자신의 주검을 화장하여 뿌려달라고 부탁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 역사는 이상설의 일생을 독립운동가로만 기록한다. 저자가 직접 방문한 만주 용정시 대성중학 역사전람관에도 수학교육자로서의 이상설 모습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이상설의 수학 관련 업적을 포함한 구체적인 행적 전반이 거의 드러나지 않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독립운동으로 일제의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그는 주위의 독립운동가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자신과 관련된 일체의 행적을 적극 은폐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이상설은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면서도 우리나라가 선진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 특히 근대 서양수학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스스로 근대 서양수학을 독학으로 학습하여 강의하고, 수학교과서를 저술하고, 고종의 1895년 교육조서를 받들어 수학과목을 정식으로 관립교육기관의 교과과정에 도입하는 등 중요한 교육적 업적을 이루었다. 과학사학자 박성래 교수는 2004년 이상설을 ‘한국 근대수학교육의 아버지’라고 평가하였다.

수학자 또는 수학교육자로서 이상설에 대하여는 그 이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2007년 ‘이준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는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 최익현과 이상설이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처럼 안중근이 이상설을 특별히 존경한 배경에는 이상설의 남다른 교육철학과 교육활동이 있다고 판단된다.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공판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열거한 이토의 15개의 죄목에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의 해외유학을 금지시킨 죄,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라는 교육 관련 죄목이 3가지나 되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상설은 근대수학을 깊이 이해한 선각자이고, 특히 한국의 정규 고등 교육과정에 최초로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한 인물이며, 근대수학 교과서를 최초로 발간한 탁월한 수학교육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설이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뒤 충북 진천에 있던 이상설의 생가가 복원되고, 이상설을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한국 독립운동의 큰 재목으로 꼽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서 그의 진정한 ‘선구자’ 역할은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시작에 있는 것이다.(이상설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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