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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섣달 그믐의 저녁 단상’ 최명숙
섣달 그믐밤의 어둠이 깊다 창가에는 아직 마른 국화꽃이 걸려있고 책상 위에는 완성하지 못한 시 한편이 놓여 있다 한 살을 더할 인생의 나이테를 단단히 하지 못하고 미완으로 맺을 일년의 저녁 본래의 작은 나를 돌아본다 비록 작은 나였을지라도 여리고 착한 이들과 더불어 온 날들은 살만한 날이었다. 서로에게 눈과 귀, 다리가 되어 동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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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시와 음악] ‘식구생각’···김민기 작사작곡·노래 양희은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학교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오실까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지을라 내다 보실라 미류나무 따라서 곧게 난 신작로 길 시커먼 자동차가 흙먼지 날리고 달려가네 군인가신 오빠는 몸 성하신지 아빠는 씻다말고 먼 산만 바라보시네 이웃집 분이네는 무슨 잔치 벌렸나 서울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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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늘의 시] ‘어느 1월의 아침’ 김영관
새해의 아침이 조금씩 조금씩 창문 유리 사이로 삐져들고 있을 때쯤 나는 깨끗한 몸으로 108배를 끝냈을 무렵 베란다 너머로 들려오는 쓰레기 차소리 찌이잉 척! 자연스럽게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헬스장에 갈 준비를 한다 다른 날과, 아니 다른 달과, 아니 다른 해와 크게 다름이 없이 매일이 그렇하듯, 매달이 그렇하듯, 매년이 그렇하듯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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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와 음악] 설날 ‘윤극영'(1903~1988)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 아버지 어머니도 호사 내시고 우리들의 절 받기 좋아하세요. ?우리 집 뒤뜰에다 널을 놓고서 상 들이고 잣 까고 호도 까면서 언니하고 정답게 널 뛰기가 나는나는 좋아요 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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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시와 음악] ‘베낀’ 허수경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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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와 음악] ‘겨울꿈’ 유안진
비루먹은 말(馬)일수록 伯樂*이 그리운 법 산너머도 산은 있듯이 폭풍의 언덕을 넘어선 나이에도 폭풍은 다시 불까 깡깡 언 하늘에도 노을은 타들고 눈밭머리에도 싹이 돋는 쓴 냉이를 바라보다가 저 혼자 웃으며 고개 드는 꿈 하나. *백락 : 중국 전국시대 사람으로 말(馬) 감정가 –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유안진 시선 <빈 가슴 채울 한마디>,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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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겨울비’ 허유
마음은 춥고 사랑 가난할 때 겨울비 내리다. ? 저 창 너머 잡다한 인생의 관계들 이부자리 개듯 다독거려 정돈할 양으로 이 겨울비 한벌의 무거운 적막을 입고 내리다 ? 내 이제 그리운 마음 하나하고도 별거하고 잡아줄 따뜻한 손길마저 저 늙은 나뭇가지의 거칠음 같거니 ? 또 내세의 우물을 현세의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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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와 노래] ‘국’ 최정례
외국에 나와서 제일 그리운 것은 국이다 국물을 떠먹으면서 멀리멀리 집으로 떠내려가고 싶은 것이다 너무 추워서 양파 수프를 시켰는데 쟁반만 한 대접에 가득 수프가 나왔다 김도 나지 않으면서 뜨거워 혀를 데었다 너무 짜고 느끼하고 되직해 먹을 수가 없었다 몇숟가락 못 뜨고 손들었다 국이란 흘러가라고 있는 것이다 후후 불며 먹는 동안 뜨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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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와 음악] ‘봄여름가을겨울’ 이설야
봄여름가을겨을 다시 겨울 겨울은 손목이 가는 눈발 ? 지난 겨울은 잘 있습니다 그때 내린 눈은 아직 다 녹지 못한 채 올해는 올해의 눈이 내립니다 ? 우리는 흩뿌려진 눈처럼 몇년째 만나지 못했습니다 역병은 거리의 불빛을 모두 잠재우고 햇빛도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눈송이들은 눈송이들과 함께 흩어지면서 하염없이 내립니다 내리는 눈이 하나로 뭉쳐진다면 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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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늘의 시] ‘월요일 아침’ 박노해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우울하다 찌부둥한 몸뚱이 무거웁고 축축한 내 영혼 몹시 아프다 산다는 것이 허망해지는 날 일터와 거리와 이 거대한 도시가 낯선 두려움으로 덮쳐누르는 날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병을 앓는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로 나를 일으키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엄중함 나는 무거운 몸을 어기적거리며 한 컵의 냉수를 빈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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