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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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바람이 바뀌었다’ 박노해

    천둥번개가 한 번 치고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더니 하루아침에 바람이 바뀌었다 풀벌레 소리가 가늘어지고 새의 노래가 한 옥타브 높아지고 짙푸르던 나뭇잎도 엷어지고 바위 틈의 돌단풍이 붉어지고 다랑논의 벼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검붉게 익어오고 산국화가 꽃망울을 올리고 하늘 구름이 투명해지고 입추가 오는 아침 길에서 가늘어진 눈빛으로 먼 그대를 바라본다 조용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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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오늘의 시] ‘진짜 나로’ 박노해

    진짜 장소에 진짜 내 발로 진짜 표정으로 진짜로 말하고 진짜로 살아 움직이는 진짜 사람을 만나야겠다 그러면 지금 여기 딛고 선 나의 근거들이 감정과 욕구와 관계가 이 확실성의 세계가 진짜 얼마나 가짜인지 진짜 살아있는 그곳에 진짜 사람인 그 곁에 진짜 나로 서 보고 싶다 살아서 진짜로 진짜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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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돌려라 힘’ 박노해

    힘내자 어떻게 한번 빼요 힘 한번 버려 힘 힘들게 붙잡고 있는 걸 한번 놓으면 돼 힘은 내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것 있는 힘을 제대로 돌리는 것 돌려라 힘! 한번 놓아 그리고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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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유랑자의 노래’ 박노해

    지구는 여행길이네 인생은 여행이라네 하루에서 다른 하루로 미지의 길을 떠나는 우리 모두는 여행자라네 나에게는 집도 없네 안주할 곳도 없네 온 우주와 대지가 나의 집이라네 계절이 흐르는 바람의 길 위에서 두 어깨 위에 인생을 짊어지고 작은 천막에 잠시 쉬었다 떠나가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대지와 밤하늘의 별빛과 강인한 두 발과 뜨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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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아가야 나오너라’ 박노해

    한 점은 온전하다 씨앗은 온전하다 둥근 것은 작아도 온전하다 둥근 엄마 뱃속의 아가는 처음부터 이미 온전한 존재 신성하여라 너는 우주의 빛과 사랑으로 잉태된 존재 다만 너를 가두고 누르고 한쪽만을 키우려는 낡은 생각이 둥근 원을 깨뜨리고 온전함을 망치는 것이니 둥근 빛의 아가야 지금 작고 갓난해도 너는 이미 다 가지고 여기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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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흰 철쭉’ 박노해

    이 땅의 봄의 전위, 진달래가 짧게 지고 나면 긴 철쭉의 시절이다 화려한 철쭉은 향기가 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흰 철쭉에서만 이리 청아한 향기가 나는 걸까 4월에서 5월로 가는 아침에 하얀 얼굴에 이슬관을 쓰고 가만가만 내게로 걸어오는 너 의로운 벗들은 진달래 꽃잎처럼 붉은 피를 흩뿌리며 앞서갔는데 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이리 무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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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무임승차’ 박노해

    두 손에 짐을 들고 저상버스를 오르다 고마웠다 미안했다 나의 무임승차가 나 대신 불편한 몸을 끌고 울부짖고 나뒹굴고 끌려가면서 끝내 저상버스를 도입한 휠체어의 사람들 오만하게 높아만 가는 세상을 모두 앞에 고르게 낮춰가는 지상의 작고 낮고 힘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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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정월正月 언 가지에’ 박노해

    정월 빈 가지에 바람이 운다 이 밤에 나는 아직 울지도 못했는데 정월 흰 가지에 바람이 운다 이 아침 나는 아직 울지도 못했는데 멀리서 눈이 오는 소리 눈보라처럼 진실이 몰아쳐오는 소리 정월 언 가지에 바람이 울 때 울지도 못한 가슴들아 빈 가지 같은 손길들아 발길도 얼은 사람들아 언 가지마다 꽃이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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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좋은 날은 지나갔다’ 박노해

    봄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 좋은 날은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다 봄을 떠밀어가며 너무 빨리 덮쳐오는 여름 무더위처럼 가을의 등을 타고 너무 빨리 엄습하는 겨울 한파처럼 젊음도 사랑도 기쁨도 열정도 인생은 길어져도 삶의 좋은 날은 짧아져만 가고 젊음은 길어져도 가슴의 별도 꽃도 반짝 시들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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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두려워 마라’ 박노해

    두려워 마라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실패도 상처도 죽음마저도 실패는 나를 새롭게 하는 것 버릴 건 버리고 나 자신이 되는 것 상처는 나를 강하게 하는 것 그 상처로 상처 난 이들을 품어가는 것 두려워 마라 시련 속에서 계시가 온다 한번 울고 한번 웃고 너의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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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한가위 배구 잔치’ 박노해

    추석이 다가오면 마을에선 돼지 세 마리를 잡았다 우린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지켜보다 돼지 오줌보를 받아 입 바람을 불어 넣고 축구를 하느라 날이 저문 줄도 몰랐다 누나들은 조각조각 천을 이어 붙여 돼지 오줌보에다 씌워 배구공을 만들고 동네 정미소 마당에서 경기를 벌였다 길게 땋은 머리를 묶고 흰 무명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날리며 서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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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인간은’ 박노해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는 만큼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성찰하는 만큼 세상의 실상을 바로 보게 된다 인간은 고귀한 것을 알아보는 만큼 자기 안의 고귀함을 체험하게 된다 인간은 우주의 비밀을 아는 만큼 인간 그 자신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내어주고 사랑한 만큼 영원한 생의 깊이를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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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박노해

    봄비를 맞으며 옥수수를 심었다 알을 품은 비둘기랑 꿩들이 반쯤은 파먹고 그래도 옥수수 여린 싹은 보란 듯이 돋았다 6월의 태양과 비를 먹은 옥수수가 돌아서면 자라더니 7월이 되자 어머나, 내 키보다 훌쩍 커지며 알이 굵어진다 때를 만난 옥수수처럼 무서운 건 없어라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네 맑은 눈빛도 좋은 생각도 애타고 땀 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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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진공 상태’ 박노해

    여름날 아흐레쯤 집을 비웠더니 밭에도 흙마당에도 풀이 가득하다 풀을 뽑다 돌아보니 어느새 풀이 돋아난다 여름에는 풀이 나는 게 아니라 풀이 쳐들어온다 빈 공간을 사정없이 침투하고 무참하게 진군해 온다 자연에는 진공 상태가 없다 사회에는 백지 상태가 없다 권력에는 순수 상태가 없다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혁명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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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오늘의 시] ‘걷는 독서’ 박노해

    눈 덮인 자그로스 산맥을 달려온 바람은 맑다 따사로운 햇살은 파릇한 밀싹을 어루만지고 그는 지금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입 맞추며 오래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선조들의 복장과 걸음과 음정 그대로 근대의 묵독 이전의 낭송 전통으로 ‘걷는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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