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는 기억하고 있었다…1983년 그날 밤, 두 해병의 이름

지난 10월 15일 아침, 경북의 한 바닷가를 찾았다. 전날 영천호국기념관을 둘러본 뒤 대구에서 묵었다. 인터넷으로 경북 지역의 전적지를 검색하다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발견했다. 무장공비 격멸 전적비였다.
꼬불꼬불한 산고개를 몇 번이나 넘었을까. 길은 마침내 바닷가에 닿았다. 별도의 주차장도 없었다. 길 건너 아직 문을 열지 않은 횟집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전적비를 살펴보았다.
전적비는 쓸쓸했다. 뒤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비문에는 1983년 8월 4일 밤 11시 40분, 경북 월성군 양남면 수렴리 앞 해상으로 침투하던 북한 무장공비 일행을 경계 근무자들이 발견해 교전 끝에 격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경계 근무를 하던 해병 두 사람이 다섯 명의 침투조를 막아냈다. 비석 뒷면에는 이동기 상병과 오덕환 일병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신문에는 무장공비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이야기도 들었고,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러면 궐기대회가 열리곤 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몽둥이로 학생들을 자주 때리던 체육 선생님의 별명이 무장공비였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를 가리키던 말이 학교에서는 두려운 선생님을 빗대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1983년은 내게도 낯선 해가 아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경상남도에서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하던 때였다. 그보다 앞서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했을 때는 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군사훈련을 받으며 추위에 떨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나도 고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절, 다른 곳에서는 밤새 바다를 바라보며 경계를 서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나보다 몇 살 아래였을 이동기 상병과 오덕환 일병도 그중 하나였다.
오늘의 경계 상황을 생각하며 전적비 앞에 서니 두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자신의 임무를 다한 두 해병이 있었기에 그 바다를 무사히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비석은 이제 쓸쓸하게 서 있지만, 그들이 지켜낸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다.
작년에 이곳 가까이에 있는 주상절리를 보러 왔었다. 그때는 전적비가 있는 줄 몰랐다. 같은 장소에 왔어도 보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바위가 아니라 비석을 보았고,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다.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 들고 다음 목적지인 함안 경찰승전기념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흔적을 만날 예정이었다.

지난해 10월 백마고지를 다녀온 뒤로 전국의 전적지와 호국기념관을 찾아다니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한 여정은 아니다. 한 곳을 다녀오면 다른 곳이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이제는 나 자신이 《천로역정》의 크리스티앙처럼 길을 걷는 순례자가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순례자는 반드시 먼 곳에 있는 성지를 향해 가는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오래전 자기 몫의 일을 다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뒤늦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사람일 수도 있다.
바닷가의 전적비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