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쟁터에선 적군, 병상에선 환자…노르웨이 청년이 본 한국전쟁

(위)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NORMASH)에서 전기 기술자로 근무했던 청년 다비드 란뷔(1931~2024)의 전쟁 기록을 담은 책 표지. (아래) 한국전쟁 당시 눈 내리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군인들의 모습.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갔다.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NORMASH,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의 유물이 전시된 곳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그 가운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설명에는 NORMASH에서 사용했던 수술 기구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의사인 내 눈에는 조금 이상했다. 꽤 큰 공업용 집게처럼 보였다.

“이게 정말 수술 기구인가요?”

곁에 있던 도슨트에게 물었다. 그녀는 나를 3층의 학예사에게 안내했다. 학예사와 NORMASH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책 한 권을 내게 건넸다. 한 노르웨이 청년이 한국전쟁 중에 쓴 일기였다.

이름은 란뷔(David Randby, 1931~2024).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의사가 아니었다. NORMASH의 전기팀에서 일한 젊은 기술자였다.

그런데 일기를 읽어보니 그가 맡은 일은 전기만이 아니었다. 처음 NORMASH를 세울 때 발전기를 연결하고 작동 상태를 점검했다. 추운 날에는 난방기를 책임졌고, 병원의 오르간이 고장 나면 그것도 고쳤다. 환자가 밀려들자 X선 촬영법을 배웠다. 일손이 부족하면 수술실에 들어가 마스크를 쓰고 집도의 곁에서 수술을 도왔다. 전기 기술자로 한국에 온 스물한 살 청년이 전쟁 속에서 병원의 여러 일을 떠맡고 있었다.

그의 일기에는 그런 NORMASH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중공군을 만났다.

평화회담이 진행되고 포로 교환 방안도 논의되고 있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선에서는 고지를 두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지를 중국군이 차지했다가 미군이 다시 탈환했다. 엄청난 수의 부상자가 NORMASH로 밀려들었다.

란뷔는 그곳에서 한 미군 병사를 만났다. 병사는 벙커 안에 있었다. 탄약은 모두 떨어졌고, 안에는 다른 미군들도 많이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영어가 들려왔다.

“부상자가 있습니까? 저는 의무병입니다.”

부상자가 있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수류탄 하나가 벙커 안으로 날아들었다. 중공군이 그들을 속인 것이었다.

병사는 수류탄을 집어 밖으로 다시 던지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수류탄이 터졌다. 그를 제외한 벙커 안의 미군들은 모두 죽었다. 그는 머리부터 다리까지 심하게 다쳤지만 살아남았다.

그는 란뷔에게 말했다. “제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 주님이 저와 함께하셨답니다.”

그날 란뷔가 알게 된 중공군은 적군이었다. 영어로 의무병인 척하며 수류탄을 던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그의 눈앞에는 또 다른 중공군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총을 든 병사가 아니었다. 중상을 입은 포로 네 명이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사흘 동안 방치되다가 발견됐다.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규정에 따라 소총과 총검으로 무장한 경계병이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들은 의료진을 매우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눈을 찌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란뷔는 공산주의자 교관들이 유엔군에게 붙잡히면 고문을 당하게 된다고 가르쳤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들에게 유엔군은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두려워해야 할 존재였다. 어쩌면 괴물이었다.

그러나 NORMASH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을 고문하지도, 해치지도 않았다. 그저 치료했다. 중국군이든 유엔군이든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다.

전쟁터에서는 이념이 사람의 얼굴을 지운다. 적군이라는 이름 하나로 한 사람을 집단 속에 가두고, 그 위에 괴물의 얼굴을 씌운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 피를 흘리는 순간에는 달라진다. 피는 국적을 묻지 않는다. 상처도 이념을 구별하지 않는다. 스물한 살의 란뷔가 본 것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그는 중공군이라는 거대한 군대를 보았다. 그러나 NORMASH의 병상에서는 피를 많이 흘린 네 명의 젊은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씌워졌던 괴물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란뷔는 짧게 기록했다. “우리는 중국군이든 유엔군이든,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다.”

전쟁터에서는 이념이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그러나 병상에서는 피가 먼저 보인다. 그때 사람은 다시 사람의 얼굴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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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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