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회견·입장문···“유명인들의 ‘가짜·공갈·위선’ 이젠 그만”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와 ‘투계’ 그리고 ‘덕화만발 강령’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왜 한국의 정치인들은 얄팍하기가 유리잔 같을까? 조금 더 의연한 이 나라 정치지도자는 없는 것일까? <장자> ‘달생편’을 보면 옛날 주(周)나라 선왕은 닭싸움을 매우 좋아했다. 한번은 왕이 당대 최고의 투계(鬪鷄) 조련사인 기성자를 불러서 자신의 싸움닭을 맡기며 최고의 싸움닭으로 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열흘이 지나자 왕은 기성자에게 닭싸움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지금은 한창 사납고 제 기운만 믿고 있어 기다려야 합니다.” 열흘이 다시 지나고 왕이 묻자 기성자가 대답했다. “다른 닭의 소리를 듣거나 그림자만 보아도 바로 달려드니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고 왕이 묻자 기성자가 답했다.
“죄송하지만, 아직도 다른 닭을 보면 곧 눈을 흘기고 기운을 뽐내고 있으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40일이 지났을 때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이제는 닭싸움에 내보낼 수 있겠느냐?” 그러자 기성자가 왕에게 대답했다.
“이제는 다른 닭이 소리 지르고 위협해도 쉽게 동요하지 않고 평정심이 있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목계(木鷄)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덕이 온전하여 다른 닭이 가까이 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목계는 나무로 만들어진 닭이라는 뜻으로 “상대의 도발(挑發)에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지도자가 되면 유난히 조급해지는 경우가 있다. 부하 직원들이 자신을 욕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동료 중에 자신을 제치고 올라오는 사람은 없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염려하고, 불안해 한다.
지도자는 목계처럼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정치지도자는 더 그렇다. 그래야 그 덕이 온전해지며, 조직이 동요 없이 잘 운영될 수 있다.
그렇다면 목계처럼 의연한 지도자가 되려면 어찌하면 좋을까? 그것은 ‘중용(中庸)의 도’를 실현하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중용이라 함은 모든 면에서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필자가 운영하는 ‘덕화만발’에서는 “덕화만발의 주인은 다음 네 가지의 강령을 지킨다”고 다짐한다.
첫째, 우리는 맑고, 밝고, 훈훈한 낙원세상을 지향한다.
둘째, 우리는 편협한 종교, 이념, 정치를 배격하고 중도를 지향한다.
셋째, 우리는 서로 돕고 이끄는 상생상화의 정신을 지향한다.
넷째, 우리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활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에 대하여 말하면서 ‘중용이 덕의 핵심’이라고 설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명예와 불명예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긍지요, 그 과도는 이른바 허영이요, 그 부족은 비굴이다. 노여움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온화요, 그 과도는 성급함이며, 그 부족은 성질 없음이다. 진리의 중용은 진실이요, 그 과도는 허풍이며, 그 부족은 거짓 겸손이다. 돈을 주고받는 일에서 중용은 너그러움이며, 그 부족은 인색함이고 그 과도는 방탕이다. 이 같은 중용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젖은 행동의 습관화다.”
일시적으로 어쩌다가 우연하게 ‘중용의 덕’을 행했다고 하여 항구적일 수는 없다. 시종일관한 자세, 언제 어디서나 중용에 맞는 언행, 덕 있는 행동을 거듭하는 가운데 덕의 습관, 중용의 덕을 쌓을 수 있다. 그래서 중용의 습관에 맞춰 신뢰성 있는 삶을 사는 자를 일컬어 우리는 ‘인격자’라 부른다.
‘가운데 중(中)’은 산술적인 평균치가 아니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대상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와 자세로’ 대하는 것이 참된 중용이요, 덕이다.
가짜 단식이나 가짜 기자회견, 가짜 입장문 등으로 국민을 우롱(愚弄)하는 행동으로는 국민을 감동시키기는커녕 언젠간 진실이 밝혀져 크나큰 화를 입게 된다.
국민을 감동시키는 것이 정치다. 거짓 단식, 거짓 기자회견, 거짓 입장문을 보며 목계처럼 의연한 이 나라의 진정한 지도자는 없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은 나만 드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