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창안] 문자 만들기, 자·모음 확정이 첫걸음

국응도 박사는 북미 원주민언어 연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 중 하나다. <사진=오룡>

문자 창안, 그 역사 문화적 배경 (4)

원주민어 ‘세종대왕’ 국응도 박사…문자 6종 창안 보급

아시아에는 2300여 종의 언어가 있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언어의 보존성과 기록성은 표기체계(writing system, 문자)를 통해 완성된다. 문자가 없는 문명이 어떻게 사장됐는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 아메리카가 라틴 문자(Latin script, 알파벳) 일색인데 비해 아시아엔 복잡한 형성과정을 거친 고유 문자가 많다.

각 언어가 문자를 갖춘 과정은 세계 언어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근대 이후 문자를 제정 또는 창안한 언어는 서구의 영향으로 라틴 문자를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아시아 언어 중에는 인도네시아어, 말레이어, 베트남어 등이 그렇다. 인도네시아어와 말레이어 문자는 영어에서 쓰는 알파벳 26자를 변형 또는 추가 없이 그대로 사용한다.

이에 반해 베트남어 문자는 라틴 문자에 6개 성조를 붙인 문자를 포함한 모음 12자, 자음 17자를 사용한다. 라틴 문자의 ‘F, J, W, Z’ 등 4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베트남어의 라틴 문자화는 17세기 서양 신부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선교사들은 약 200년에 걸쳐 베트남어 발음에 가까운 성조를 개발해 1838년 현재의 문자를 확정했다.

이처럼 서양 선교사들이 라틴 문자를 사용해 토착언어의 문자를 만든 시도는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에서 흔히 있었다. 그러나 모든 시도가 실패해 문자로 존속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북미 원주민언어학자 국응도(78) 박사는 “사용자의 언어직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주민 원로와 그들의 언어로 얘기 나누는 국응도 박사 <사진=오룡>

캐나다 캘거리대학 언어학과 교수를 지낸 국 박사는 북미 원주민어 중 가장 사용자가 많은 아타바스카 어족 6개 언어의 문자를 만들어 보급했다. 국 박사가 라틴 문자로 창안한 원주민어 문자와 문법은 현재 실생활에서 쓰이며 원주민마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원주민 언어를 말살한 미국과 달리 캐나다는 상대적으로 포용성 있는 원주민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국 박사는 현직교수 시절 원주민어 문자 만들기 프로젝트에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문자 만들기는 현장에서 채록한 음성분석을 통해 모음과 자음 수를 확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어 각 자모에 해당하는 알파벳을 부여한다. 새로운 글자를 만들지 않을 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작업이다. 다중언어학자인 그는 실제로 자신이 연구한 한글 창제원리를 원주민어 문자 만들기에 활용했다. 국 박사는 1969년 캘거리대학 교수로 임용된 뒤 캐나다 매니토바에서 앨버타에 이르는 북부 대평원과 브리티시 콜롬비아, 유콘·노스웨스트 준주에 산재한 원주민마을을 누비며 자료조사를 벌였다.

그가 단어·문장을 채록하는 기초작업을 거쳐 만든 첫 문자는 사시(Sarcee)다. 문자를 만든 뒤 원주민 교사들에게 가르치는 데 보통 1주일, 길어도 1달 안에 읽고 쓰기를 배운다고 한다. 그는 “문자는 해당언어의 음성구조와 직관에 맞아야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다. 한글이 좋은 문자인 것도 한국인의 음성과 직관에 맞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음운체계를 파악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모음이 10개 이상인 것처럼 들려도 엄밀한 음성분석을 거쳐 6개로 판정되기도 한다. 국 박사가 만든 칠코틴(Chilcotin) 문자의 경우 자음이 무려 47개다. 종교학자가 고등·저등 종교를 구별하지 않듯 언어학자는 언어를 고급·저급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언어마다 운음·의미상 특징이 있을 뿐이다. 예컨대 원주민어 치포앤(Chipewyan)에는 한국어에 전혀 없는 치간음(interdental)이 5개나 돼 th, tth, tth’ 등으로 표기한다. 북극권에 사는 이누이트, 에스키모 언어에는 눈을 지칭하는 명사가 30 여 개, ‘하얗다’는 형용사가 수십 가지에 이른다.

칠코틴 부족 캠프에 참여한 마을 원로들. 칠코틴어로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한국 방송사에서 온 제작진이 캠프를 촬영한다는 공지다. <사진=오룡>


“사용자 언어직관에 맞아야”

원주민어 연구에 관한 명성이 알려지자 원주민들이 국 박사에게 직접 글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북스토니(Nothern Stoney)어를 쓰는 부족의 추장이 마을 원로들과 함께 와 정중히 부탁했다는 것이다. 스토니는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에서 수우족(Sioux)이 쓰던 말이다. 그는 “문자를 만들어준 뒤 마을에 길과 학교 이름을 쓴 간판이 들어선 것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옐로우나이프 근방 원주민들은 그들이 만든 치포앤 문자로 부족의 전설을 출판하기도 했다.

어느 학문이나 사전은 항목마다 그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학자가 집필을 맡는다. 국응도 박사는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온등 전문서적에서 ‘Amerindian Language’라 불리는 북미 원주민어 항목을 도맡아 썼다. 원주민어 분야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케 한다. 그의 영문 이름은 ‘E.D. Cook’이어서 문헌으로만 대한 사람은 그를 서양인으로만 아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기자는 지난 2004년 여름 국 박사와 함께 캐나다 서부 칠코틴 부족의 연례 연어잡이 캠프를 참관한 적이 있다. 칠코틴 문법책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인근에 산재한 6개 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현장을 찾은 길이었다. 문자 만들기에 비해 문법 체계화는 훨씬 더 힘든 일이다. 글자는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2년이면 완성되지만, 사전과 문법책 편찬은 오랜 시간과 노역이 요구된다.

칠코틴 문자를 가르치는 원주민마을 학교 교실 <사진=오룡>

이 자리에는 MBC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동행했다. 국 박사의 문자 고안작업 과정을 담은 이 프로그램은 그 해 한글날 특집으로 방영됐다. 원주민들에게 언어는 종족의 정체성을 분별하는 기준이다. 국 박사는 그들 언어에 문자를 선사함으로써 문명의 기록과 전승이란 중대한 기능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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