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오 동갑나기’ 정호승이 이동순에게 “평화가 형과 함께”

정호승 시인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시인 정호승(1950~ )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대구에서 성장했다. 원래 가문의 터전이나 근거지는 대구이지만 부친의 직장을 따라 다니다가 경남 하동에서 다만 출생했을 뿐이다. 대구 계성중, 대륜고, 경희대를 다녔다.

1973년 대한일보신춘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72년엔 한국일보 동시도 당선된 바 있어 시와 동시 두 분야에 관심이 깊다. 같은 1973년 신춘 당선자들과 뜻을 맞춰 동인지 <1973>, <반시>를 발간하기도 했다.

김창완, 김명인과 친밀했고 최하림씨의 열음사에서 4인 시집 <마침내 겨울이 가나 봐요>를 발간할 때 그 동참의 뜻을 나에게 묻는 편지 내용이다. 정겹고 자상한 성품이 문장에서 듬뿍 느껴진다.

개인사의 액운과 풍파를 만나 몹시도 힘든 고난의 시기가 있었는데 이 편지에서는 심신이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지만 호승은 유난히 가혹한 시련과 아픔을 겪었다.

친구의 고난에 아무런 도움도 못 주고 그저 안타까움만 머금던 그 시절, 이젠 거친 풍파도 다 지나고 고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인생의 배는 나아간다. 어느덧 노경에 다다른 것이다.

업적도 성과도 많고 빛나는 광채가 느껴진다. 동갑나기 친구이지만 그때는 마치 연애편지처럼 문장을 풀어갔고 서로 극진한 존칭과 경어체를 썼다. 다정한 친구의 건강과 평화를 빌어마지 않는다. 살아보니 이게 최고의 으뜸이다. 30대 시절에 받은 친구의 편지를 찾아서 올린다.

정호승이 이동순에게

보고싶은 동순 형!
동순 형의 새해를 축하드립니다.
물리적으로야 시간의 변화나 매듭을 느낄 수 없는 일이지만 새로운 해를 축복하듯 눈이 하도 많이 내려 저도 덩달아 신의 축복을 받은 듯합니다.

언제나 동순 형을 그리워하면서도 소식 한장 제대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동순 형을 늘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해에 불현듯이 동순 형을 만난 일이 지금 생각해도 즐겁습니다. 고속버스 타는 데까지 배웅하지 못하여 퍽 죄송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인생공부 하느라 참으로 열심히, 그러나 퍽 부끄럽게 살아왔습니다. 근간의 3, 4년이 언제 어떻게 지나가버렸는지 지금 생각하면 저으기 안도감조차 느낍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야할 지 다소 확실하게 느낀 지난 몇 년 간이었습니다. 술을 잘 못할 정도로 건강을 잃었다는 동순 형의 말을 듣고 퍽 안타까웠습니다.

언젠가는 난초잎 위에 눈송이 내리듯 스러져 버릴 우리의 삶이지마는 그래도 하고싶은 일이 있을 때까지는 날마다 쑥쑥 자라나는 아이들이 한 사람 어른이 될 때까지 건강해야 합니다.

이제 저는 퍽 건강합니다. 지난 날에 비하면 그리 큰 악몽도 없습니다. 미움도 없고 증오도 없습니다. 오히려 잔잔한 미움, 싫음 등의 일에 매달리게 되는 제 자신이 요즘 우습습니다.

올해는 그동안 제대로 쓰지 못했던 시를 좀 써볼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어렵습니다. 또 깊은 생각도 사상도 갖지 못한 채 그저 밤낮 회사 일에만 매달리다가 녹초가 되곤 하여 어떤 땐 제 스스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동순 형은 이상하게 창비에 대작을 발표하려 하면 창비가 문을 닫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낙담하지 마시고 꾸준하십시오.

얼마 전 김창완, 김명인 형과 함께 한 자리에서 73년에 등단한 지 벌써 10여년이 넘었으니, 동순 형과 저를 포함해서 4인 시집을 한번 묶어보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별다른 문학적 뜻은 내세울 것이 없고 그저 같이 출발해서 오늘에까지 함께 걸어왔다는 의미에서…….출판사는 최하림 씨가 맡아하는 열음사입니다.

동순 형만 좋으시다면 함께 했으면 합니다. 그동안 시집이나 기타 지면에 발표한 작품 중에서 20편, 신작 10편, 도합 30편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창완 형과 명인 형과는 수일 내에 다시 만나 서로의 작품을 의논, 선정할 작정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동순 형이 결정할 문제로 우리 세 사람의 열망이나 강요(?)에 따르시면 안됩니다. 제 생각엔 그저 우리 세 사람의 우정을 다짐하고 앞으로의 문학적 삶을 위한 자신과의 약속, 뭐 그런 데에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하림씨에게는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이므로 출판에 대한 사업성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보고싶은 동순 형! 새해엔 부디 눈길을 많이 걸어다니시고, 또 위의 문제에 대해 답장도 보내주십시오.

평화가 동순 형과 함께…….

1986. 1. 7

정 호 승

정호승이 이동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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