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살에 서울대 3번째 졸업 이국희씨 “주말에도 캠퍼스 생활에 푹 빠져”

[아시아엔=박수진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세 번째 다니는 서울대지만, 이번에 다닌 게 진짜 같네요.”

이국희씨

올해 72세를 맞은 이국희(수의학66-71·경영74-78·지구환경과학75-20)씨는 하나도 받기 힘든 서울대 학부 졸업장을 세 개나 가졌다. 마지막 졸업장을 받은 것이 지난 2월. 명예 졸업이 아닌, 지난 2016년 재입학해 4년간 성실한 학교생활 끝에 얻은 결실이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역사상 가장 오래, 가장 늦게 공부한 학생이 되었을 이씨를 4월 27일 그가 감사로 재직 중인 기업의 가산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본래부터 공부 욕심이 없지 않았다. 1971년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학사 편입으로 경영학과와 지질학과에 진학했다. 당시는 서울대 학부 졸업자에 한해 정원에 여유가 있는 학과의 편입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씨는 이어 서울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해 유수의 기업 임원으로 승승장구했다.

‘월급쟁이에겐 진검승부뿐’이라는 생각으로 전쟁에 임하듯 일에 몰두하던 어느 날, 아내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물리쳤다 생각하면 다시 시작되는 끈질긴 싸움이었다. 그땐 아내를 살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표를 던지고 5년간 곁에서 헌신적으로 간병했지만 결국 홀로 되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형제와 슬픔을 나눌 수 있지만 배우자가 떠나면 슬픔이 오롯이 내 몫이에요. 하루하루 위축되어 갔죠.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작은아들이 ‘졸업하지 못한 학교를 다시 다녀보시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습니다. 학교에 전화해 알아봤더니 재입학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지질학과엔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둔 덕분에 학적이 남아 있다고요.”

그렇게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50년 만에 돌아간 대학은 모든 게 ‘상전벽해’였다. 옛 지질학과는 지구환경과학부로 바뀌어 지질학은 물론 대기학과 해양학까지 세 가지 전공과목을 공부해야 했다. 다행히 ‘수의학과 경영학도 넓게 두루 공부할 수 있어 좋았다’던 그의 적성에 잘 맞았다. 옛날에 이수한 과목을 전공으로 인정받았지만 새로 공부하는 것이 더 많았다.

“예전에 다닐 땐 ‘판 구조론’을 이론적으로만 배웠어요. 이번에 다시 와보니 1년에 몇 센티미터씩 움직이는 걸 인공위성으로 확인하는 수준까지 와서 정말 놀랐죠. 배울 게 얼마나 많겠어요. 서울대 교수님들이 절대 학생들 쉬도록 놔두지 않아요. 따라가느라 고생 좀 했죠.”

기억 속 황량한 풍경과 달리, 이제 없는 게 없는 캠퍼스 생활에도 푹 빠졌다. 매일 아침 8시 서울대입구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와 공부하다 밤 9시 도서관 앞에서 셔틀을 타고 하교했다. 주말도 예외가 없었다. 하루 세 끼를 교내에서 해결하며 캠퍼스에 살다시피 했다. “혼자 살려니 식사가 힘들어 요리학원에 다닌 적도 있습니다. 학생식당이 열 곳이 넘는데 메뉴가 다양해서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죠. 관정도서관은 꿈도 꿔보지 못한 환상 그 자체였고요. 시설로는 하버드대 못지않아요.”

젊은 날 전공 공부에 치여 누리지 못했던 교양 공부는 삶을 풍성하게 채워줬다. ‘까짓 거 학점 좀 나쁘면 어때, 듣고 싶은 강의를 듣자’ 이런 생각으로 공부한 것이 세 번째 학교생활의 가장 큰 수확이다. 각 단과대학을 누비며 음악, 미술, 공연 등 예술 분야는 물론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태리어, 아랍어 등 외국어 강의를 섭렵했다.

청강에 계절학기까지 시간표가 늘 꽉 찼고 도서관에 있는 오페라 DVD도 절반 넘게 봤다. “제 나이가 되면 세상을 좀 즐겁게 살고 싶은데 대부분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요. 다양한 수업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느끼려면 뭘 알아야만 하는구나’ 생각 많이 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총명한 학생들, 미안할 정도로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는 교수님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 영광이었다”고 했다. 무턱대고 조언을 구한 메일에 친절히 답해준 교수님의 도움으로 배낭 하나 둘러메고 평생 잊을 수 없는 미술 기행도 다녀왔다. 함께 공부하면서 젊은이들의 생각을 좀더 이해하게 됐다.

“예전에 비해 학생들의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진 것 같아요. 학점에 무척 예민한 모습에도 놀랐고요. 사회생활을 해보니 넓게 알고 전체를 조감하는 눈을 가지는 게 더 중요한데, 점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후배들의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죠.”

욕심 없이 공부했지만 졸업 학점은 3.29점으로 ‘선방’. 생애 처음 졸업논문도 썼다. 예전부터 관심 있었던 금을 주제로 전통적인 가치척도로서 금의 역할과 국내에 금과 은이 매장된 광상을 살펴봤다.

코로나19 탓에 마지막 졸업식이 열리지 않아 아쉬울 법한데 “설령 졸업식이 있었더라도 나이가 많아 참석했을지 모르겠지만, 졸업장만 받아 왔더니 며느리들이 아쉬워 하더라”며 웃었다. 그는 의사인 두 아들을 두었다.

그는 “배우는 데 30년, 일하는 데 40년, 베푸는 데 30년이라면 이제부턴 내가 배운 것으로 남을 돕고 나누며 살고 싶다”고 했다. 전경련 자문위원을 지내며 중소기업에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그 나이에 무슨 공부냐’는 핀잔도 받았지만 “나도 할 수 있을까” 부러워 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런 이들을 떠올리며 그가 제안했다.

“동창회와 모교가 합심해서 동문들이 모교가 보유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서울대 인터넷 강의 ‘스누온(SNUON)’에 명강의가 많아요. 세상을 넓게 보는데 큰 도움을 줬죠. 모든 동문이 저처럼 학교에 다시 다닐 수는 없겠지만, 인터넷으로 학교의 최신 자료를 활용하는 일은 무리가 아닐 겁니다. 동창회에 일정한 기부금을 낸 사람에게 더 많은 스누온 강의를 듣고 도서관 전자 자료도 이용할 수 있도록 자격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이제 더는 서울대에 다닐 수 없다”는 그의 얼굴에는 섭섭함과 후련함이 함께 비쳤다. 인터뷰를 하며 재입학을 결심했던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 듯 종종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기자가 “작고한 부인께서 졸업 소식을 듣고 기뻐하시겠다”고 하자 미소만 짓더니, 한참 후 “학교를 다닌 게 슬픔이 옅어지는 데 큰 도움이 되긴 했다”고 했다.

슬픔은 옅어져도 그리움은 여전히 짙다.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쓴 편지라며 보여준 글 속에 그가 하루하루 헛되지 않게 살아가려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하늘나라에 가 있는 당신이 하루 휴가를 낸다면, 한 시간만이라도, 아니 5분만이라도 내게 올 수 있다면 원이 없겠어…(중략)…당신이 내 곁에 없었던 자리가 얼마나 컸었는지, 수많은 날들이 얼마나 허전했던지 이야기하고 끌어안고 엉엉 울고 싶어. 잘 있어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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