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 이 기사] 원조 단군신화가 실린 <고기>의 발굴을 기대하며
古記云昔有桓?(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 우리역사의 시원을 밝힌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조선 단군신화에 관한 기록 일부다. <고기(古記)>를 인용함으로써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단군신화의 내용이 자신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 엄연히 역사서의 기록에 나와 있다는 것을 밝혀서 대외적으로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태까지 <고기>는 단지 ‘옛 기록’을 뜻하는 보통명사라는 견해도 있었고, 하나의 역사서를 가리키는 명칭이라는 주장도 있어 그 실체에 대해 논란이 거듭돼 왔다.
이런 논란의 중심에 있던 <고기>가 11~12세기 고려시대에 편찬돼 20세기 초까지 실물로 전해져 널리 읽힌 역사서라고 밝힌 논문이 발표됐다고 한겨레는 4월 16일자 22면에서 일간지 가운데 유일하게 전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18세기 신경준이 인용한 <고기>의 내용인 직산 홍경사의 비석 돌과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고기>가 인용된 것을 바탕으로, <고기>가 고려 현종 17년~인종 23년(1026~1145) 사이에 지어진 역사서로 추정했다.
김 교수는 또 안정복(1712~1791)이 <동사강목>에서 실제로 <고기>를 읽어 보았고 그 내용을 10여 차례 인용하면서 인명·지명이 불경에서 유래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승려가 지은 책이라고 피력한 점도 근거로 들었다.
그리고 그는 구한말 언론인 장지연이 1906년 <동사고기>를 우리나라 승려가 기술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보물이라고 쓴 내용의 글도 확인된다며 “<고기>의 실물이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김 교수의 논고는 학계에서 <고기>만을 집중 조명한 첫 열매이며, 고려시대 문헌사에 머물렀던 <고기>에 대한 논의의 영역을 조선시대와 근대로까지 확장시키는 물꼬를 텄다는 평가도 나왔다고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만약 김 교수의 주장대로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기>가 1026~1145년 사이에 나온 역사서이거나 그 책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단군신화를 몽골제국과의 항쟁기와 이후 조선 초기에 걸쳐 민족 정체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반원·반고려의 성격을 띤 정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태동했고 발전된 것으로 보는 요즘 역사학계 일각의 주장은 앞으로 설자리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에 대한 몽골의 1차 침입이 1231년인 <고기>가 나온 한참 뒤에야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므로.
설령 백 번 양보하여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기>가 김 교수가 추정하는 시기(1026~1145)에 쓰인 역사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구려 각저총 벽화의 신단수로 보이는 나무 아래의 호랑이와 곰 그림이 단군신화의 내용이 아니라고 단정할 확증은 아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실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처럼 역사책에 기록된 것만을 우리 역사로 다뤄야 한다고 편협하게 범위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군신화를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여 우리 역사에서 제거하거나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 영화를 외면하는 바보스러운 짓과 다름없는 것이며, 훗날 우리 후세가 영화를 현실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우리 시대를 다루는 역사에서 영화와 관련된 것을 삭제하더라도, 무덤 속에 있는 우리가 후세의 과오를 탓할 수도 없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도, 영화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 생활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 조상들이 살아오면서 함께 호흡하고 생사고락을 이어온 조상들의 문화 자산의 일부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곧 단군신화는 어떤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 조상들의 삶 속에서 당대 사람들의 시대정신과 사유 체계가 반영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오다가 역사 기록으로 정착된 문화적 산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들의 역사 영역에 대한 상상력이 넓어지고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화 창달에도 훌륭한 자양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세계인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오늘날 단지 단군신화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일제가 국권을 탈취한 직후인 1910년 9월 30일 ‘조선의 제도와 일체의 구습관을 조사한다’는 미명 아래 총독부 내에 취조국(取調局)을 설치하고, 심지의 개인의 서고까지 무차별로 뒤져 약 51종 23만여 권의 서적을 불태우거나 강제로 반출했는데, <고기>는 제발 그 환난에서도 무사히 보존되고 있기를….
김상현 교수의 논고를 밑거름으로 <고기>에 대한 후속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고, 아울러 어딘가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기>도 어두컴컴한 곳에서 얼른 빠져나와, 우리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학계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그 진가가 십분 드러날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The AsiaN 편집국 news@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