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敵)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

[아시아엔=박성훈 호원대 초빙교수, 통일교육원장·통일부 정책실장·청와대 통일비서관 역임]  지난 12월 중순, 오랜만에 일본을 다녀왔다. 교토(京都)는 처음이다. 한 곳에만 머무르되 특별히 정해진 여정이 없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보는 자유여행이다.

천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정돈, 청결, 질서, 친절, 배려의 유전자가 이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흐른다. 아늑한 도심의 료칸(旅館)은 과객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을 만큼 사근사근하고 평안하다.

일본 역사를 훑어보면, 유혈 낭자한 한편의 무협소설을 읽는 느낌인데, 치밀하면서도 성급하고 고상하면서도 잡스러운 이들의 본성은 과연 무엇일까.

태평양 전쟁(1941-1945)이 끝나갈 무렵, 미국 전략 당국은 최후 수단으로 핵폭탄을 쓰기로 결정하고, 투하지역을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고위전략회의를 하고 있었다. 교토도 여러 후보지역 중에 하나였다. 전략위원 중 일부는 교토 폭격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그들에게 교토는 오래 전 잊지 못할 신혼여행의 추억이 서린, 아름다운 古都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마터면 천년 세월의 골동품 교토가 핵폭탄의 참화로 사라질 뻔하였다. 1945년 도쿄(東京)에 진주한 맥아더 장군(1880-1964)이 바다건너고국에 돌아갈 생각은 잊어버리고 달콤한 일본에 푹 빠져 지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역사가 숨 쉬는 고도의 도심을 천천히 걷던 중에 우연히, 거대한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명품 고적인가? 무심히 쳐다보던 중, 커다란 솟을대문 앞에 세워 놓은 간판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法華宗 大本山 本能寺”!

일본 역사상 최대의 대반전이 일어났던 그 현장이 바로 눈앞에 있다. 글로만 읽었던 참극이 벌어진 장소가 바로 여기…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슴이 뛰었다. 수백 년 전, 일본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를 뒤집어 놓을 함성과 외마디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敵は 本能寺に あり!!”

가문들 간에 살육과 암투가 절정을 치닫던 센고쿠(戰國)시대, 1582년 6월 2일 새벽 6시,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가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묵고 있는 혼노지를 포위하고 쳐들어가면서 부하들에게 내지른 시살명령이다.

불의에 모반을 당한 오다는,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피땀으로 일구어 온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화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8세기 헤이안(平安) 시대 이후, 오랜 세월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을 이루어 온 교토(京都) 시내 한복판, 그 웅장하고 화려한 대사찰 건물은 충천하는 살기와 날름거리는 불길에 휩싸여 지옥의 광끼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희대의 이 모반사건을 일본 역사에서는 ‘혼노지(本能寺)의 변(變)’이라 칭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혼노지의 변’에는 반란의 주동 인물인 미쓰히데 외에 여러 주요인물들이 등장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세 사람은 절묘하게 서로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생사와 권력의 영욕을 넘나든다.

교토의 게이샤 ‘마이코’

오다 노부나가의 최후 

혼노지의 변(1582)을 전격 수습한 히데요시가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하고, 호전적 권력놀음에 빠진 그는 10년후 임진왜란(1592)을 일으켜 이웃나라 조선에 엄청난 전화를 입힌 뒤 병사(1598)했고, 절치부심 인내하며 기회를 기다리던 이에야스는 기필코 패권을 장악, 쇼군(將軍)이 되어 에도막부 시대(江戶幕府 1603-1867)를 열게 된다.

혼노지의 변으로 히데요시가 등장했고,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깨져버린 조선은 병자호란까지 겪은 뒤, 결국 일제에 패망하는 환난을 비켜가지 못했다. 일본의 역사뿐 아니라, 후일 조선의 운명에도 엄청난 임팩트를 가한 ‘혼노지의 변’ 이 사건의 경위와 원인에 대해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네이버 등 여러 자료들을 보며 재정리해 본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묵게 된 이유는 휴식. 최후의 전투를 지휘하기 직전에 쉬면서 작전을 구상하려는 의도였다. 최대의 라이벌이며 기마군단으로 유명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가문을 멸문시킨 직후여서 노부나가는 느긋했다.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 통일이 눈앞에 온 상황. 끝까지 저항하는 서쪽의 모리(森) 가문과 대치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나중에 도요토미로 개명)로부터 병력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지원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親征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미쓰히데는 그의 본거지인 탄바(丹波)의 카메야마(亀山)성에서 출전 준비를 마친 후, 5월 29일 1만3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츄고쿠로 출정 길을 떠났고. 노부나가도 머물고 있던 아즈치(安土)성을 떠나 교토의 혼노지로 이동해 있었다.

혼노지는 절이기는 했지만 성처럼 방비가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쓰히데의 영역이어서 노부나가는 불과 100여명의 수졸만 이끌고 있었을 뿐이었다. 츄고쿠로 향하던 미쓰히데는 6월 1일 병력을 이끌고 지원명령을 이행하는 척하다가, 길을 돌아 교토를 향해 밤을 새워 급진 행군, 노부나가에게 배신의 칼을 겨누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수하 병력들에게 교토로 진군하는 이유를 열병식 참가라고 둘러댔다. 오다 노부나가를 따르는 장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혼노지를 습격할 때도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하는 적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혼노지에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 말이 “내부의 배신을 경계하라”는 의미의 관용구처럼 사용되고 있다. 20년 동안 최측근으로 신뢰받으며 온갖 충성을 바쳐온 주군에게 왜 그랬을까.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일본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대의 배반이라는 이 사건의 원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원한설이 다수이다. 주군과 가신 관계이기는 하지만, 노부나가가 불같은 성정으로 미쓰히데의 자존심을 여러 차례 건드려 怏心이 배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직접 천하를 갖겠다는 미쓰히데의 야심설,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의 영지를 빼앗을 기미가 보여 미리 선수를 쳤다는 영지 몰수설도 있다. 일본 통일이 다가오면서 점차 폭군으로 변해가는 노부나가를 징벌하기 위한 ‘독재자 제거를 위한 정의설’, 힘없는 일본 국왕이 노부나가를 제거하고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은밀하게 명령을 내렸다는 ‘밀지설’도 회자된다. 심지어 예수회 음모론도 있다. 노부나가의 탄압을 예상한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쿠데타를 사주했다는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와 손을 잡고 모반했다는 음모설도 있다. 수많은 분석이 쏟아지는 가운데 확실한 것은 사건의 결과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노부나가의 운명. 70여명의 시종, 호위무사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던 노부나가는 최후의 순간에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할복하며 49살 생애를 마쳤다.

둘째는 권력의 계승. 하시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뒤를 이었다. 최전방의 병력을 되돌려 쏜살같이 달려온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군대를 단칼에 진압하고 권력을 통째로 물려받았다. 이 과정 역시 미스터리다. 모​리 가문과 대치하던 히데요시는 주군인 노부나가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모리 가문과 휴전을 맺고 급히 병력을 돌렸다. 혼노지의 변 발생으로부터 불과 11일 뒤인 6월 13일, 히데요시는 2만4000명으로 1만2000명을 동원한 미쓰히데 군단을 무찔렀다. ‘당대 최고의 조총부대’를 운용하고 있다고 믿었던 미쓰히데는 도주하던 중 농부에게 붙잡혀 어이없게 죽었다고 전해진다.

히데요시가 어떻게 모리 가문과 전격 협상해서 휴전하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병력을 재배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자아낸다. 병력 열세를 뻔히 알던 미쓰히데가 최후의 전투에 최정예병력 3000여명을 대동하지 않았던 것도 미스터리다.

말단병사 출신으로 한겨울에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안아 발탁된 히데요시는 일본 최고의 권력자로 떠올랐다. 일본 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이라는 성까지 하사받았다. 혼노지의 변(1582)이 없었더라면 관백(關白)이라는 최고 권력에 오른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없었을 것이고, 임진왜란(1592-1598)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사망(1598)한 뒤 일본의 패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장악한다. 노부나가의 동맹이었으나 히데요시에게 굴종하며 인고의 세월을 겪어온 이에야스는 에도막부(1603)를 세워 명치유신(1867)까지 264년 동안

일본 근세사를 지배했다. ‘노부나가가 지은 농사로 히데요시가 차린 밥상을 이에야스가 통째로 받아먹은 셈이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감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부자유를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일거든 곤궁할 적을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함의 기반이며, 분노는 적이라 여겨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일을 모른다면 몸에 화가 미친다. 자신을 책할지언정 남을 책하지 말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이에야스 유훈)

이에야스는 일본 전국시대의 최종 승자가 되어, 이에야스 막부의 창업자가 되었다.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인내와 인고의 결과였다. 그의 유훈에는 신중 온유 절제가 처연하게 스며있다. 의리와 배신이 무상하던 시대, 여러 다이묘(大名)들 간에는 정략결혼이 많았다. 오다와 이에야스는 동맹관계이자 주군관계였다.

오다의 장녀 도쿠히메(德姬)는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信康)의 아내였다. 그녀는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에야스 부인 츠키야마 도노(築山殿) 와도 갈등이 있었다. 도쿠히메는 츠키야마와 노부야스가 다께다 가문과 내통하며 반역을 도모했다고 오다에게 고발장을 보냈다. 오다는 이에야스에게 처자를 처벌할 것을 명했다.

츠키야마는 도쿠가와 가신들에 의해 살해되고 노부야스에게는 할복으로 자결하게 하였다(1579). 히데요시는 이부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姬)를 이혼시켜 이에야스의 후실로 보냈다. 강제 정략결혼이었다(1586).

관백(關百, 관례상 藤原氏가문이 이 직책을 맡아 왔으며, 이외의 관백은 豊臣秀吉과 그의 양자뿐이었음. 1590년 일본을 재통일한 풍신수실은 자신을 將軍이라 칭하지 않고 등원씨의 후손임을 선언, 관백이 된다)이된 히데요시는 급속히 불어난 휘하 영주들에게 나눠줄 땅을 확보하고 비대화된 군사력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정벌군을 일으켰다. 이에야스를 비롯한 도요토미 가의 중진들이 반발했다.

히데요시 사후 쇼군이 된 이에야스는 1607년 조선에 공식 사과하고 왜란은 히데요시 혼자 저지른 전쟁임을 강조하였으며, 참전한 다른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출진한 것이라 해명하며 사죄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의 수하에 있을 때, 오다의 여동생 오이치(1547- 1583)를 사모하였다. 오이치는 1567년, 오다의 명으로 아자이 가문의 당주인 아자이 나가마사와 정략 결혼하였다. 장신에 절세미인이었던 그녀는 세 딸을 두었다,

후에 장녀 차차(茶)는 히데요시, 차녀 하쓰(初)는 교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 삼녀 고우(江)는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79-1632)와 각각 혼인한다. 1573년, 오다와 아자이 간의 동맹이 깨지고, 오다의 공격으로 나가마사 가문이 멸망하자 오이치는 남편따라 자결하려 하였으나, 설득에 못 이겨 어린 세 딸과 함께 친정으로 되돌아갔다. 10년 후 1583년, 보호자였던 오다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오이치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오다의 후계문제로 대립한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아 멸문하자 가쓰이에와 오이치는 불타는 성에서 동반 자결하였다. 이때 나이가 37세. 결국 세 딸 중 가장 모친을 많이 닮은 장녀 차차는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어 외아들 히데요리(秀賴 1593-1615)를 낳았다. 1598년 히데요시 사망 당시 6세였던 히데요리는 1615년 이에야스의 공격을 받고 오사카 성이 함락되자 모친과 함께 자결하였다.

오이치의 삼녀 고우는 두 번째 남편이 임진왜란에서 죽자, 1594년 이에야스의 삼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혼인하였다. 그는 1605년 이에야스의 쇼군 직을 이어 받는다.

오사카 성에 있는 처형과 처조카를 공격하기를 주저했는지, 70대의 이에야스가 노구를 이끌고 지휘하여 오사카 성을 함락시킨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최고권력자의 자리까지 출세한 배경에는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 또는 네네라고 불리는 정실부인의 내조가 컸다고 한다.

후사가 없던 네네는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듬해 오사카 성을 떠나 홀로 교토로 이주하였다. 1605-6년에 엔토쿠인(圓德院)과 고다이지(高臺寺)를 건립해 1624년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히데요시와 모친의 명복을 빌며 승려처럼 여생을 보냈다. 이에야스가 건물 건립을 위해 재정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죽은 후에는 히데타다가 네네를 원조해 주었다. 히데타다가 어린 시절 도요토미 가문에 인질로 보내졌을 때, 아들이 없던 네네가 각별히 보살펴 주었던 인연이 있었다.

고다이지 마당 한 켠에 오래된 벚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말년의 네네 여인처럼 고적하고 쓸쓸해 보인다. 어쩐지 鬼氣가 감돌고 있다고나 할까. 매년 3월 버드나무처럼 땅에 닿을 듯 늘어진 가지마다 분홍색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면, 네네의 영혼도 꽃으로 윤회하여 한동안 머물다 가는가. 서울의 도곡동 양재천변에도 매년 3월말 4월초가 되면 이와 비슷하게 생긴 시다레사쿠라 한 그루가 아름답고 휘황하게 만개한다. 휘날리는 벚꽃 잎은 마치 인생 탐욕 권력 영화의 덧없음을 눈으로 보고 느껴보라고 일러주는 것처럼.

Leave a Reply